하얀 연막 뒤 피어나는 고소한 추억
표선민속오일시장, 2일과 7일마다 43명 상인 주민들과 인심 교류
문명이 날마다 새로운 것을 세상에 내놓고,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강요한다. 세상이 빠르게 변하는 만큼 마음은 급해지니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다. 뭐 딱히 해놓은 것도 없는데 유수 위를 떠다니는 부초처럼 삶은 덧없이 지나고 있다.
그래도 그 단조로움에서 벗어날 길이 있다. 제주에는 어디든지 5일에 한 번씩 장이 열리고 있다. 딱히 중요한 볼일이 있는 게 아니어도 오며가며 둘러보고, 사람 사는 얘기 나눌 수 있는 곳이다. 채소 한 움큼에도 흥정이 붙고, 흥정 끝에는 사람 사는 이야기가 오간다.
파는 자는 손님이 찾아줘서 고맙고, 사는 자는 주인이 알아봐줘서 반갑다. 물건을 사고팔고자 모였지만 실상 사람들은 장에서 삶의 고단한 짐을 잠시 내려놓는다. 그 떠들썩한 풍경을 통해 우린 잠시 세상이 살만하다는 위안을 얻는다.
바람이 꽤 세게 부는 날, 표선오일장을 들렀다. 민속시장이면서도 읍내 중심권에 자리 잡고 있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오일장 입구 기둥 문에 적힌 ‘혼저옵서예’라는 문구가 정감 있다. 문에 적힌 대로 2일과 7일마다 여기에 장이 선다.
장은 도내 다른 오일장에 비해 규모가 작다.(전국적으로 규모를 비교하면 작은 편이 아니다.) 장옥 한 동과 어물전 한 동, 식당 등이 있는 한 동이 전부다. 상인 43명이 입주해서 물건을 팔고 있다. 과일을 파는 상인에게 물었더니 서귀포장은 물론이고, 고성오일장에 비해서도 찾는 사람이 많이 적다고 했다.
표선면 인구는 1만1000여명으로 서귀포시 5개 읍면동 가운데 안덕면 다음으로 적다. 게다가 최근에 농협하나로마트 등 할인매장들이 근처에 들어섰다. 농촌지역도 생활양식이 도시화되는 경향이 있어서 오일장이 위축될 만한 상황이다.
과일과 채소를 조금 사고 점심을 먹기로 했다. 음식을 먹을 곳도 한 집 뿐인데, 간판도 가격표도 없다. 음식이 국밥과 국수뿐인데, 국밥을 두 그릇 시켰다. 국밥은 푸짐한데, 한 그릇 6,000원이라니 주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식사하는 동안 다른 테이블 손님들이 과일을 사와서 식당 주인장과 나눠 먹었다. 또 다른 테이블에서는 70대 정도로 보이는 어르신 손님들이 국밥에 곁들여 소주를 드셨다.
식당 박정순 사장님은 7년째 국밥집을 운영하고 있다. 다른 장에는 나가지 않고, 오로지 표선 오일장에서만 장사를 한다. 장이 서지 않는 날에는 고사리도 꺾고, 귤도 따면서 용돈을 번다.
박 사장님은 “표선오일장에 오로지 물건 살 목적으로 오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물건 많이 살려면 차 끌고 서귀포나 제주시로 가요. 여기는 오며가며 들러서 먹고 놀다 가는 거지”라고 했다.
밥을 먹고 나오는 길에 오래 된 익숙한 소리를 들었다. 어릴 적 골목에서 자주 보던 뻥튀기 소리다. 하얀 연막이 터진 후 코끝에 전해오는 구수한 과자냄새가 어릴 적 추억을 불러 깨웠다.
이 오래된 뻥튀기 기계를 다루는 분은 윤덕노 사장님이다. 서울에서 살다가 부인의 건강이 안 좋아 13년 전에 짐을 싸고 제주도로 내려왔다. 당시에 제주에서 일거리가 없어서 생활비라도 벌 마음으로 뻥튀기 장사를 시작했는데, 그 일이 지금까지다. 윤 사장님은 표선오일장과 고성오일장 두 군데를 나간다.
쌀, 마른 떡, 콩, 무말랭이 등 손님들이 가져오는 재료들도 가지가지다. 깡통 다섯 개가 있는데, 손님들은 빈 깡통에 재료를 넣고 차례를 기다린다. 통 하나를 뻥튀기로 만드는데 20분가량 걸린다. 한 통 뻥튀기하는데 요금이 4천원이다.
윤 사장님은 “이렇게 하루 종일 해도 스무 통 밖에 못해요. 그럼 하루에 8만원 벌고, 거기에 과자를 팔면 조금 더 버는 거예요. 노인네 부부가 그거면 먹고 살잖아요”라고 말했다.
얘기를 나누는데 할머니 한 분이 쌀 한 되를 갖고 왔다. 윤 사장님이 “한 시간 반은 기다리셔야하는데 괜찮으시겠냐”고 물었는데, 할머니는 “그럼 기다려야지, 닷새 뒤에 쌀 한 되 다시 들고 와야겠다”며 기다릴 뜻을 표했다.
그리고 얼마 후 아주머니 한 분이 썰어서 말린 가래떡을 갖고 왔는데, 윤사장님은 “마감했다”며 더 이상 손님을 받지 않았다. 계산해보니 대략 세 시경에는 장이 끝나는 모양이다.
나도 과자 두 봉지 사고 “다음엔 고성오일장에서 뵙자”고 인사를 드렸다. 부부가 2만 7천원을 썼는데, 배도 마음도 장바구니도 모두 든든했다.
| 서귀포시 표선민속오일시장 |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표선면 표선리 1002-1번지에 개설된 민속 오일시장이다. 장이 열리는 날은 매월 2·7·12·17·22·27일이다. 부지 면적은 9,100여㎡이다. 상인들은 주로 채소와 청과, 곡물, 수산물, 의류 및 신발류 등을 판다. 시설이 부족해 상인과 이용객들이 큰 불편을 겪었는데, 지난 2008년에 사업비 7억 5000만원을 들여 연면적 1,260㎡ 규모에 지상 1층 장옥을 신축했다. 2009년 이후 3억 원의 사업비를 추가로 투자해 간이 장옥 시설 1동과 화장실 1동 등을 건축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