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바라본 ‘중문사람’…세대를 잇는 ‘사람책’
10명 어르신의 특별한 기록 우리나라 최초 수의사부터 문구점 운영 34년의 삶까지 세대 통합형 문화사업 모범
지난해 12월 19일 제주국제컨벤션센터에서는 ‘중문사람’ 책 발간회와 토크쇼가 개최됐다.
바로 서귀포시 중문동지역사회보장협의체(공동위원장 김재희, 고창보)가 세대 간의 소통과 지역 정체성 강화를 위한 프로젝트로 제작한 책이다. 이 작은 책 한권은 주민들이 주민참여예산으로 직접 제작한 결실로, 세대 통합형 문화사업의 모범을 보여주었다는 평가와 함께 지역사회에서 작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이 책은 중문동이라는 지역의 특별한 역사기록 작업으로 진행됐다.
중문초등학교에 재학중인 지역 어린이들이 직접 중문동 역사의 산 증인인 어르신들을 인터뷰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담아내는 ‘휴먼북’을 제작했고 제목을 ‘중문사람’이라 지었다.
이번 프로젝트는 중문동지역사회보장협의체와 중문초의 협력으로 이뤄졌다. 특히 교육복지연구학교특화사업의 일환으로, 학교와 지역사회가 함께 하는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는 평가다.
책은 1893년 중문동에서 태어나 조선인 최초로 오사카부립대학 수의축산학과를 졸업한 후 우리나라 최초의 수의사로 알려진 고 이달빈 선생부터 중문 농업 변천사의 산 증인인 강상흥 어르신, 중문 출신인 대표적인 제주의 향토사학자인 김오진 선생, 중문 여성으로서의 삶을 인터뷰한 강수자 어르신, 그리고 중문초등학교 앞에서 34년 동안 문구점을 운영한 고명실 어르신 등 중문 출신 10명의 어르신들이 중문동이라는 지역에서의 그들의 삶을 아이들에게 잔잔히 알려주는 방식으로 구성된 책이다.
문구점을 운영하는 고명실 어르신의 인터뷰에 참여한 중문초 5학년 권노아 학생은 “인터뷰 때 예전에는 문구점 앞에 오락기가 있었다고 들었다. 그런데 부모가 아이들이 학원에 안 간다고 항의해서 없어졌다고 하셨는데 지금은 친구들이 PC방에 다니면서 오히려 더 학원에 안 가는 것 같다”고 웃었다.
옛날 문구점에서 유행했던 물건과 현재 물건의 차이를 여쭤봤다는 중문초 5학년 양승지 학생은 “인터뷰를 하고나니 문구점이 평소와는 조금 달라보였다. 일부러 문구점 앞을 지나가려고 살짝 길을 돌아서 간 적도 있었다”고 수줍게 웃었다.
아이들과 함께 인터뷰를 진행한 중문초 김도훈 교사는 “교사 입장에서 중문초의 역사를 가장 잘 알고계신 분이 누구일까를 고민했고, 그런 이유로 아이들이 친근해하고 학교 앞에서 문구점을 오래 운영하신 고명실 어르신을 인터뷰 대상자로 선정했다”며 “문구점 어르신이 바라본 중문초의 역사, 그리고 중문초 아이들이 바라본 문구점의 역사가 서로 맞물리는 작업이 되어 의미깊었다”라고 소감을 전했다.
고명실 어르신은 “그렇게 오래 문구점을 운영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는데 아이들이 와서 인터뷰를 하니 ‘내가 정말 오래 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됐다”고 미소지었다.
이번 사업은 중문초에서 교육복지사로 근무하는 오지선 복지사의 역할이 컸다. 2023년 당시 중문동주민센터 김미숙 맞춤형 복지팀장과 정유근 지역사회보장협의체 위원장, 그리고 오지선 복지사가 의기투합해 이 사업을 시작했다.
오지선 복지사는 “아이들이 마을의 어른들을 알고 우리 마을에 대해 자부심을 갖게되기를 바랬다”고 사업 시작의 취지를 밝혔다.
‘중문사람’을 발간한 휴먼북추진위원회의 정유근 위원장은 발간사를 통해 “인터뷰 대상자 한분 한분을 ‘사람’으로서 만나고 어른과 어린이들이 다른 시각으로 접근하기를 바랬다”고 밝히며 앞으로 중문동 휴먼북 시리즈가 이어지길 바란다는 소감을 전했다.
이번 책 발간은 아이들이 만나는 일상적 공간과 어른들을 새롭게 바라보는 계기가 됐다. 양승지 학생은 “다음에는 급식실 건물 쪽 횡단보도에서 매일 아침 만나는 교통봉사 할머니를 인터뷰해보고 싶다”라는 포부를 전했다.
주민참여예산으로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단순한 책 발간을 넘어서는 의미를 담고 있다.
아이들의 시선으로 발견한 마을의 보물 같은 이야기들이 앞으로도 ‘중문사람’을 통해 이어질 지 기대된다. 이번 책은 세대를 잇는 따뜻한 기록이자, 마을의 정체성을 담아내는 소중한 자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