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구자의 꿈

강호남 / 도시공학박사

2025-08-13     서귀포신문

풀종다리가 울던 18671013일 밤, 교토의 숙소 오우미야는 사무라이들로 북적였다.

그들은 막부 수장인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알현하러 간 고토 쇼지로 일행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겨우 니조 성을 나온 고토는 천황의 행정담당 니조 간파쿠에게 가야 했으나 회담 결과를 알리기 위해 서둘러 편지를 썼다.

오늘의 결과를 알립니다. 쇼군께서 정권을 조정에 반환할 뜻을 밝히셨소

2층에 머물던 사카모토 료마는 급하게 전달된 편지를 받아들고 고개를 숙였다. 숙소에 대기하던 무리의 실제 대장이었던 료마는 계단 아래를 내려다보며 입을 뗐다.

쇼군의 심중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용케도 단안을 내리셨다. 놀라운 용단이셨다. 나는 맹세코 공을 위해 한 목숨을 바치리라

메이지유신을 만든 정권 반환의 뜻은 이튿날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명의로 천황에게 올려졌다. 이로써 265년 유지되어 온 에도 막부는 막을 내렸다. 일본 남서부 작은 섬에 위치한 도사 번 하급 사무라이 집안 청년은 일본 현대 체제를 설계하고 실현한 주인공이 되었다. 사카모토 료마는 사쓰마조슈 동맹을 성사시키고, 선중팔책을 제시했으며, 카이엔타이 창설로 근대 일본 기업의 모형을 제시했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기 말대로 목숨을 바친다. 그 해 1115일 밤, 자객들의 습격을 받은 것이다. 자신이 바라보던 새로운 시대, 메이지유신을 1년 앞둔 어느 날이었다.

이후 17년이 지난 1884년 조선. 한양에서는 개혁의 움직임이 분주했다.

경의 뜻대로 하거라. 그대가 뜻하는 대로 개혁과 개화를 이루도록 내가 적극 지원하겠노라

고종은 서약서를 김옥균에게 전하며 말했다. 김옥균은 힘있게 대답했다.

소신은 전하의 뜻을 받들어 이른 시일 안에 개혁과 개화를 행동으로 추진하겠습니다

김옥균의 집에서는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서재필 등이 거사 계획을 짜고 있었다. 124일 궁궐에서 친청파 대신들을 제거하고 14개 조 정강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들의 행동은 성공하지 못했다. 3일 후 1500명의 청나라 군대가 개입했고 개혁파는 도망자 신세로 전락했다.

이들이 사용한 방법은 정권 수뇌부만 교체하는 전형적인 쿠테타였다.

이들이 보유한 무력은 직접 지휘하는 무장병력 90명과 원거리에서 동원할 수 있는 2100여명 그리고 일본군 지원군 200명에 불과했다. 이들은 외척 민씨 중심의 척신 세력을 죽이거나 권력을 빼앗아 그 자리를 장악한 후 재빠르게 정국을 안정시키는 조치를 취하려 했다. 갑신정변은 실패했고 김옥균은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중국 상하이에서 암살당한다.

동북아가 개혁의 진통을 앓던 당시는 혁명의 시기였다.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나 왕이 처형됐고, 미국에서는 민주주의가 유지되는 듯했으나 남북전쟁이 일어나 수많은 사상자가 났다. 일본은 이미 막부파와 존왕파로 나뉘어 산발적 무력 충돌이 일어나고 있었다. 33세의 청년 사카모토 료마는, 쇼군의 권력을 천황에게 반납해 새로운 통치 체제를 만드는 것만이 민중들의 희생을 피하고 봉건제를 철폐하여 새로운 시대로 나아갈 유일한 방법임을 깨달았다.

주타로, 나는 고향에서 가와다 쇼로라는 박식한 화가에게서 이야기 들었네. 미국에서는 나무꾼의 자식이라도 대통령이 될 수 있고, 대통령의 아들이라도 자기가 원하는 것이라면 옷장사가 돼도 손가락질하지 않는다는 거야료마는 양이론자 지바 주타로에게 말했다. “그게 어떻다는 말인가?”

어떻다는 것이 아니라 사농공상의 차별이 없는 세상이 되었으면 하고 생각했던 것뿐일세

, 목소리가 너무 커주타로는 다가오는 순찰자들을 의식하며 제지했다. 그의 사상은 급진적이다 못해 반역적이었다.

나는 주상 밑에서 만인이 평등한 세상을 만들겠네

한 청년의 꿈은 많은 이의 공감을 얻어 마침내 실현되었다.

김옥균은 료마와 달리 과거 급제를 통해 중앙으로 진출한 엘리트였다. 그는 일본 출장에서 알게 된 서구식 개혁 방식에 매료되었다.

저 달은 작으나 천하를 비추는구나라는 포부를 지녔던 그는 조선은 십 분의 십 분을 다 생각지 아니하시면 어렵소라며 영국의 외교 실력자 해리 피크스에게 도움을 청하는 편지를 썼다. 그는 조선의 개혁이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시대적 과제임을 알고 있었다.

33세에 거사를 단행했던 청년 김옥균의 꿈은 먼 훗날 다른 방식, 다른 모습으로 이 나라에 실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