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물, 용천수
[에세이로 쓰는 제주의 삶] 오금자 / 수필가
오랜만에 고향을 찾아 집 근처에 있던 용천수를 찾아보았다.
용천수로 가는 길은 세월의 흐름과 함께 넓어지고 포장되어 있지만 옛 정취는 그대로 남아 있다. 길가에 핀 들꽃들과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어릴 적 기억을 되살려 준다.
용천수는 어린 시절 동네 친구들의 놀이터였다. 그때의 순수했던 마음과 웃음소리가 길목마다 남아 불쑥불쑥 고개를 내민다.
용천수에 도착하니 예전과는 달라진 모습이 눈에 띄었다.
주변은 깨끗하게 정비되었고 안전을 위한 시설도 설치되어 있다. 그러나 용천수에서는 여전히 투명한 물줄기가 솟아나고 있었다.
시원한 물에 발을 담그고 있으니 어린 시절 친구들과 물놀이하던 기억, 밤하늘을 바라보며 별을 세던 기억, 할머니와 함께 빨래하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물결 위로 얼비친다.
제주 바다 마을에는 용천수가 솟는 곳이 많다. 내 고향 위미리에는 용천수가 샘솟는 ‘테웃개’가 있다.
테웃개는 옛날 ‘떼배’를 대는 포구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작은 포구라 큰 배는 정박할 수 없지만, 시원한 용천수가 기암괴석 틈을 따라 흘러나온다. 제주에는 여러 곳에서 용천수가 솟아나지만, 이곳 테웃개에서 나오는 물이 다른 지역에서 나오는 물보다 맑고 차갑다.
▲용천수, 생명의 샘
용천수는 빗물이 지하로 스며든 후 대수층을 따라 흐르다 암석이나 지층의 틈새를 통해 지표로 솟아나는 물을 의미한다.
주로 화산지대나 지질 활동이 활발한 지역에서 발생하며, 제주도에서는 용천수가 마을 형성과 생활의 중심이 되었다. 제주도에 구백여 개의 용천수가 분포했으나, 현재는 개발과 오염으로 수량이 감소하고 있다.
오랜 세월 동안 제주도의 용천수는 제주 사람들의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보여주는 상징적 자원으로 존재해 왔다. 과거 제주는 물이 매우 귀했던 섬이었다.
육지 마을은 대부분 강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듯이 제주는 해안가의 용천수 따라 마을이 형성되었다.
지역 주민들은 유일한 식수원인 용천수를 스스로 관리하고 이용하였다. 삼다도라 불렸던 제주에 유독 모자라던 것이 물이다. 구멍이 뚫린 현무암으로 덮인 땅은 비가 올 때만 물이 흐른다. 이 때문에 멀리에 있는 용천수를 식수로 사용했다.
상수도가 보급되기 전 용천수는 마을마다 소중하고 귀한 곳이었다.
용천수를 중심으로 주민들은 모여 빨래도 하고 목욕도 하면서 공동체적인 삶을 살아왔다. 물이 귀하던 시절 제주의 여성들이 고단한 삶의 한 자락을 보여주는 곳이 용천수다.
물허벅에 물을 길어오는 일은 여성들의 몫이었다.
다른 일은 하지 못해도 물만큼은 항아리에 가득 채워야 살림이 넉넉하고 마음도 넉넉했다. 그래서 용천수는 제주인의 삶과 문화 정체성을 지탱해 온 소중한 자연유산이다.
▲인류의 문명을 만든 물
이제는 물이 귀했다는 말은 사라지고 없다. 제주에서 생산된 물이 전국을 누빈다. 제주의 물은 화산지질 특성으로 풍부한 강수량, 높은 지하수 함양률을 가지고 있다.
곶자왈은 식수 공급원이다. 비가 오면 빗물이 곶자왈의 바위 틈새로 스며 들어가 자연 정화된 뒤 해안가에서 용천수로 솟아난다.
제주도의 곶자왈은 천연 정수기 역할을 한다. 송이와 화산 용암이 겹겹이 쌓여 있어 유해 물질은 걸러지고 좋은 미네랄은 녹아든다. 용암동굴이 함몰되면서 바위 사이에 생긴 숨골은 지하수를 담아 두기에 최적한 저장 창고이다.
인류는 물과 함께 발전해 오며 문명을 이루고 도시를 발전시켜 왔다.
너무도 당연한 얘기지만 생명체는 물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물 분자 자체는 유기물이 아닌 무기물이지만, 생물과 무생물을 잇는 생명의 연결고리라고 할 것이다.
지구상 최초의 생명체가 바로 바닷속의 물에서 탄생하였으며 지구의 생명체는 탄생 순간부터 현재까지 ‘물’에 커다란 빚을 지고 있다. 또한 지구상의 물 역시 생물들 덕분에 오늘날까지 풍부하게 남아 있을 수 있게 되었다. 즉 물과 생명체는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라 서로 돕는 긴밀한 공생 관계를 이루고 있는 셈이다.
물을 남보다 먼저 차지하기 위한 분쟁은 거의 인류 문명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듯하다. 우리 속담에도 ‘제 논에 물 대기(我田引水)’라는 말이 있지만, 경쟁자를 뜻하는 영어 단어인 ‘라이벌(Rival)’은 바로 개울이나 시내를 뜻하는 라틴어 ‘리부스(Rivus)’에서 유래한 것이라 한다.
물을 둘러싼 국제적 분쟁이나 관련 문제 등은 여러 나라에 걸쳐 흐르는 긴 강의 물을 먼저 차지하려는 다툼으로 드러나고 있다.
▲물이 살아야 제주가 산다
물은 어디서나 존재하지만 어디서나 소중한 것이다.
물은 강과 바다까지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소중한 생명줄이다. 제주에서도 용천수는 끊임없이 순환하며 우리 삶과 세상의 모든 곳에 숨어있다.
물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물의 원초를 찾아가는 과정은 자신과 세상을 더 깊이 이해하고 더 큰 사랑을 품는 일이다.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말이 있다. 노자(老子)는 최상의 선은 물과 같고, 이 세상에서 물을 가장 윗길 가는 선의 표본으로 여겼다. 물은 높은 곳에 머물지 않고 낮은 대로 흐른다. 그것은 물이 가진 본성이며 동시에 삶의 겸손함이며 지혜이다.
무한한 공간과 시간을 가진 용천수가 끊임없이 솟아나며 흐른다.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거칠게 햇살에 반짝이기도 한다.
용천수가 샘솟는 것을 바라보고 있으면 가슴에는 벅찬 생동감이 살아난다. 물아래 숨겨진 평화로움이 일상의 소음을 지운다.
물은 창조적이며 경계가 없다. 담는 그릇에 따라 모습을 달리할 뿐이다. 물은 그 어느 것도 거부하지 않고 만물을 이롭게 하되 다투지 아니한다.
그러나, 무분별한 해안 매립과 지하수 개발로 용천수가 제주에서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
환경이 변함에 따라 바닷가 돌 틈 사이에서 샘솟던 용천수도 언젠가는 제주에서 완전히 없어질지 모른다. 용천수가 없어진다는 것은 생명의 고갈과 삶의 터전이 상실됨을 의미한다.
물을 소중히 여기는 일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책임이다. 용천수 물 위로 봄바람이 한들거리며 지나가고, 그 자리에는 옥빛 물 주름이 일렁인다. 샘솟는 용천수 위로 별들이 쏟아진다. 별들은 저간에 아무 일 없었느냐는 듯이 맑은 용천수의 손을 꼭 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