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상나무의 유언

[에세이로 쓰는 제주의 삶] 오금자 / 수필가

2025-10-15     서귀포신문

 

바다가 포근하게 섬을 감싸 안고 있다. 제주도 한가운데 자리 잡은 한라산은 묵묵히 하늘을 받쳐 들고 섬 전체를 가슴에 품었다.

한라산의 거대한 숲은 단순한 나무의 집합이 아니었다. 발걸음마다 느껴지는 촉촉한 이끼, 바람에 흔들리는 상록수의 속삭임, 햇빛을 가르는 새들의 노랫소리가 하나인 듯 서로 안아주며 호흡한다.

울창한 삼나무는 탑을 쌓듯 솟아오르고 참나무의 군락은 뿌리마저 얽히며 서로의 빈틈을 메우고 있다. 한 줄기의 햇살이 잎맥을 스치며 부서진다. 빛의 조각들은 황금빛 그림을 바닥에 그리며 생명의 순환을 이야기한다. 햇살도 나뭇잎 사이에서 잠시 쉬어간다. 잎사귀 그늘에서 잠시 숨을 고르던 햇살은 다시 숲의 숨소리를 깨운다.

안개가 산허리를 휘감고 있다. 아직 마르지 못한 이슬이 풀잎에 영롱한 물방울 꽃으로 남아있다. 풀잎 끝을 살짝 적신 물기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으려고 조심히 균형을 잡는다. 숲속에서 들려오는 소곤거리는 소리는 신화 속 주인공들의 속삭임처럼 아득하다. ‘설문대 할망이한라산을 베개 삼아 누웠다는 이야기처럼 산은 곡선마다 생명을 품었다. 용암이 식어 만들어진 기암절벽은 자연의 조각품이자 신들이 남긴 예술품이다.

 

죽어가는 구상나무

한라산은 돌과 나무가 서로 기대며 어우러져 숲을 품어내고 있다.

한라산 영실코스를 걷다가 크리스마스트리로 사용되는 아름다운 구상나무를 만났다.

구상나무는 소나무과에 속하는 침엽 교목으로 우리나라 고유의 특산종이다. 구상나무는 지구상에서 한반도 남부에서만 유일하게 자생하는 나무다. 잎은 선형이고 어린 가지잎은 끝이 두 갈래로 갈라진다. 나무껍질은 회갈색으로 거칠지만, 나무 모양은 수려하다. 5~6월에 잎끝에 솔방울 같은 꽃이 피고 가을에 원통형 솔방울이 맺는다.

조금 더 걸어가니 생기를 잃어가는 구상나무가 눈에 띄었다. 잎을 떨군 채 말라가는 나무를 보니 정원에 심어놓은 몇 그루 나무가 죽어가던 모습이 생각났다. 더운 여름에 물을 자주 주지 못한 나의 게으름 탓이다. 지난 여름 제주의 더위는 돌담마저도 녹아내릴 것 같이 유난히 더웠다. 그러나 한라산에는 충분한 비로 강수량이 많았을 텐데 나무가 말라가는 것이 이상했다. 동행한 지인에게 물어보니 지구 온난화로 죽어가고 있는 거라고 한다. 죽어가는 구상나무를 보니 어쩌면 정원에서 마지막을 보냈던 나무도 내 탓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육지로 반출된 구상나무는 크리스마스트리로 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정작 구상나무의 고향인 제주에서는 꺼져가는 등불처럼 잎사귀가 마르고 생명을 잃어가고 있다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기후 변화와 인간의 무관심이 빛은 결과이다. 몇 년 전부터 구상나무의 멸종위기에 대한 경고는 계속되고 있다. 특히 한라산에 자생하는 구상나무 피해가 두드러졌다는 보도를 들은 적이 있다. 해가 거듭될수록 앙상한 뼈대만을 남긴 구상나무가 오랜 세월 버텨온 모진 인고의 시간을 말해 주는 듯하다.

살아 백 년, 죽어 백 년

어디에서나 삶의 풍경은 슬프고 비정했다. 멀리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푸른 나무 같던 젊은이들이 끌려와 총 맞아 죽고, 새끼를 잃은 어미들은 비 맞은 억새같이 울다 지쳐 쓰러져 잠들었다. 구상나무의 기억은 쑥대밭처럼 서걱이고 있어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제주의 그 모진 풍진 바람 속에 많은 사람이 떠나고 죽은 그곳에 버티어 서서 견디어 낼 수밖에 없었다.

구상나무도 한때는 하늘의 별을 따려고 무던히 노력했을 것이다. 흘러가는 세월 앞에 늙고 힘들어 이미 몸은 사위어 버렸다. 움켜쥐던 손은 힘을 잃어버리고 앙상한 손가락 사이로 찬바람만 쓸쓸히 스쳐 지나간다.

죽은 나무의 그림자마저 길게 드리울 때면 제주의 아픈 상처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제주에서 일어난 온갖 사연을 알고 있는 구상나무가 멸종위기에 처해 허덕이고 있다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구상나무는 한라산 자락에 자생하면서 겨울에도 푸르름을 잃지 않아 영원한 초록이라 불렸다. 그 푸름은 어디로 가고 아픈 상처만 가슴에 안은 채 이제는 회색빛 고사목으로만 남았다. 헐벗은 가지를 앙상하게 벌리고 서 있는 구상나무를 보니 가슴 한구석이 시리다. 생전 푸르렀을 잎은 이미 먼지로 흩어졌고, 검은 줄기에는 바람과 세월의 흔적만이 깊게 패었다.

구상나무가 멸종의 길을 걷는다니 인간의 무지가 부끄러울 수밖에 없다. 사람도 죽는 단계가 있듯이 구상나무는 죽는 단계가 있다. 처음에 바로 잎이 떨어지는 게 아니라, 엽록소를 잃어가면서 차차 갈색으로 변하여 잎이 떨어진다. 시간이 지나면 껍질이 벗겨지고 하얀 뼈마디만 남긴다. 구상나무를 살아 백 년, 죽어 백 년이라 말하는 건, 고사목이 된 형태로 오랜 시간 한라산을 지키기 때문이다.

 

구상나무의 마지막 유언

구상나무는 죽어서도 제주를 지킨다고 말하지만, 그 말이 오히려 공허함을 불러온다. 생명의 흔적이 사라진 자리에서 적막함은 살아 있는 모든 덧없음을 일깨워 준다. 구상나무는 죽어서도 그 모습을 감추지 않는다. 바람과 비에 온몸을 내던졌지만, 썩지 않고 오랜 세월을 이겨낸다. 죽은 나무는 말을 하지 않는다. 빈 가지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과 바람만이 제주를 지키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억할 뿐이다.

한라산에서 구상나무가 사라지는 것은 단순한 나무의 멸종을 넘어 제주인들에게 오랜 세월 간직되어 오던 영혼과 정서가 흩어지는 일이다. 하얀 속살 내비치며 고사한 구상나무는 세월 앞에 풍화되어 가는 한라산의 풍경이 아니다. 사철 푸른 절개로 우리의 마음속에 남아있던 나무의 영혼을 되찾아야 한다. 국립공원 100경 중 제14경이 한라산 구상나무 설경이다. 구상나무에 눈꽃이 피어나면 한라산은 겨울 왕국이 된다. 겨울 등반 도중 눈보라를 만나면 나무들 틈으로 들어 가서 강풍과 강설을 피해 잠시 쉬었던 고마운 나무다.

푸른 물결 일렁이는 제주 섬에서 한라산은 어디에서나 보인다. 아침에 눈을 뜨면 아스라이 보이는 것이 한라산이요, 노을이 내리는 땅거미 사이로 내려앉는 것이 또한 한라산이다.

이 땅에 살다가 고향을 떠난 사람들도 제주도가 그리울 때 제일 먼저 떠올리는 풍경도 구상나무가 울창한 한라산이다.

구상나무가 무심하게 지나가는 바람의 귀에 대고 속삭인다. 한라산중턱에서 푸르게 푸르게 자라 이 땅을 지키는 파수꾼이 될 수 있게 해달라는 마지막 유언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