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과 ‘서귀포의 환상’
[에세이로 쓰는 제주의 삶] 오금자 / 수필가
한라산을 등에 업은 서귀포의 앞바다는 푸른 유리판처럼 아름답다.
파도 대신 바람이 먼저 다가와 뺨을 스치고 지나간다. 수평선은 하늘과 바다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며 자연의 붓질이 펼쳐진 광경이 오묘하다. 서귀포 앞바다를 바라보는 시간은 세상을 멈춘 듯 파도 소리마저 ‘서귀포의 환상’으로 속삭인다.
아이들은 맨발로 달려가 밀려오는 파도에 발을 담그며 물장구를 친다. 엄마는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한참 물끄러미 쳐다보다 어느새 저만큼 커 버렸는가 하는 혼잣말이 바람 속에 흩어진다. 모래성을 쌓으며 놀던 아이들은 제집을 찾아 달아나는 게를 잡으러 분주하게 움직인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아빠는 소중한 시간을 화폭에 담는다.
한 줌의 모래가 손가락 사이로 흐르듯 이 순간도 영원히 붙잡을 수 없음을 안다. 달이 떠오르면 아이들은 모래밭에 누워 별을 바라본다. 하나둘 별을 세던 아이들은 파도가 불려주는 자장가에 잠이 들고 가족의 하루는 수채화로만 남았다. 물감이 마르기 전에 새로운 색이 덧입혀진다 해도 오늘의 발자국은 내일의 추억이 되어 다시 바다가 부를 것이다.
▲섶섬, 문섬, 범섬과 이중섭의 흔적
바다가 조각한 시간의 흔적은 섶섬, 문섬, 범섬으로 남아있다.
섬은 서로가 떨어져 있어도 바다라는 하나의 캔버스에 점으로 찍혀있다. 섶섬의 조용함, 문섬의 신비로움, 범섬의 강렬함이 어울려져 서귀포만의 독특한 풍경을 만들어 낸다. 마치 인생의 다양한 순간들이 모여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 내듯이 세 섬은 바다의 서사시를 써낸다.
이중섭(李仲燮)은 한국전쟁 당시 일 년 정도 서귀포로 피란을 와서 거주했다. 섶섬이 보이는 언덕 위에 세 칸짜리 초가에 1.5평짜리 방에 이중섭과 그 가족이 살았다. 부산에서 배를 타고 와 화순항에 내린 뒤 한겨울 밤 걸어서 이 집에 왔다.
세간살이 없이 보따리 둘만 들고 있던 가족에게 집주인은 선선히 방을 내주었다. 그릇과 수저, 이불과 된장도 줬다고 하니 마음씨 좋은 집주인의 인심은 알만 하다. 가족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비가 오지 않는 날에는 바닷가로 나가 게를 잡아 쪄 먹곤 했다.
이중섭의 부인은 “제주도 시절 어찌나 먹을 것이 부족하던지 날마다 바닷가에 나가서 게나 조개를 잡아서 먹었는데 남편은 그것이 몹쓸 짓을 하는 것 같아 죽은 게들의 넋을 달래기 위해 게를 그린다고 말하곤 했지요”라고 당시의 곤궁한 상황을 회상했다.
작품 ‘길 떠나는 가족’은 서귀포로 떠나는 이중섭 가족의 모습을 담고 있다. 소달구지 위에서 여인과 두 아이가 꽃을 뿌리고 비둘기를 날린다.
소를 모는 사내는 감격에 겨워 고개와 손을 하늘로 치켜세웠다. 슬픈 피란이 아니라 즐거운 소풍을 가듯 흥에 겨웠다.
▲‘서귀포의 환상’을 그리던 시절
비운의 천재 화가 이중섭의 짧은 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가 서귀포 피란 시절이었다고 한다. 작품 주제가 가족과 아이들로 바뀌면서 ‘서귀포의 환상’, ‘두 아이와 물고기와 게’, ‘섶섬이 보이는 풍경’ 등 불후의 명작을 남겼다. 서귀포에 살던 시절, 그림 그릴 종이 살 돈이 없었던 이중섭은 담배갑 속의 은박지를 펼쳐서 못으로 ‘은지화’를 그렸다. 크기가 작음에도 불구하고 독특한 색감, 질감으로 인해 커다란 매력을 갖고 있다.
이중섭은 1916년 4월 10일 평안남도 평원군 조운면 송천리 742번지에서 부유한 지주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1920년에 아버지가 죽고 나서 외가에 맡겨졌다. 평양의 종로보통학교를 다녔으며 어릴 때부터 밥 먹는 일보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불꽃 같은 청년기를 원산 바닷가에서 보냈다. 파도 소리와 갈매기 울음소리가 그의 피가 되어 영혼을 살찌게 하였다.
그는 “예술은 고통 속에서 피어나는 꽃”이라 말하며 가난과 외로움을 캔버스에 쏟아냈다. 초기 이중섭 작품에는 검은 바다와 붉은 태양이 자주 등장한다. 자신에게 닥쳐올 운명을 예감이라도 하듯이 작품은 어둡고 쓸쓸하다.
문화학원 재학 중 일본 미술 공모전에 출품하여 주목받는 화가로 성장했다. 1943년에 태양상을 수상했고 이때 출품작이 ‘소와 어린이’다. 이중섭이 즐겨 다루던 향토적인 소재가 이른 시기 등장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44년 귀국해 함경남도 원산에 머무르며 작품을 준비했고 문화학원에서 만난 마모토 마사코(한국명 이남덕)과 원산에서 결혼했다. 1946년 첫 아이가 태어나지만 병을 앓다가 죽었다. 이중섭은 큰 충격을 받고 실의에 빠졌다.
1947년 해방기념전람회에 죽은 아이를 기리는 ‘하얀 별을 안고 하늘을 나는 어린이’를 출품해 호평을 받았다.
이중섭의 대표작 중 하나인 ‘서귀포의 환상’을 마주하면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캔버스를 채우고 있는 구김살 없이 장난스러운 몸짓을 한 어린아이들과 커다란 새, 먹음직스러운 복숭아. 해맑은 웃음소리와 복사꽃 향기가 뿜어져 나오는 그림이다.
이 그림을 그렸던 당시인 제주도에서의 몇 달을 이중섭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라고 말한다. 이 후 그는 부산, 일본, 통영, 진주, 서울 등지를 떠돌며 작품 활동도 하지만 1956년 9월에 영양실조와 간염으로 생을 마감했다.
▲예술가들의 영혼
인간에게 예술이란 영혼의 숨결이며 문명의 언어이다. 원시인들이 동굴에 손도장을 그림으로 남긴 순간부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인 공포와 사랑과 외경을 손과 도구로 빚어내는 일이 예술이었다.
그 후 인간은 본격적으로 자신들의 감정을 예술로 표현했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는 슬픔을,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는 고독을 전한다. 우리는 이를 보면서 ‘나의 이야기’를 생각하며 공감의 다리를 걷는다.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며 나와 타인의 내면을 들려다 보는 거울 같은 것이 예술인 아닌가 생각해 본다.
이중섭과 같이 반 고흐는 빈민 구호소에서 밥을 얻어먹으며 예술혼을 이어간 화가이다. 그의 손끝에서 화려하게 표현된 인간의 노동과 금빛 햇살과 밤하늘의 별들, “내 그림은 사람들이 죽은 뒤에야 이해될 것”이라고 고흐는 말했다.
이 말은 세상을 향한 예언이자 자조였다. 그의 그림은 죽기 6개월 전에 단 한 점 ‘붉은 포도밭(1888)’이 400프랑에 팔렸다. 예술가의 생을 지탱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오직 예술혼뿐이다. 비평가들은 “고흐의 예술은 영혼의 언어”라고 썼다.
서귀포는 이중섭에게 유토피아였다. 아내도 서귀포를 떠나면서 집주인에게 “이 집에서 보낸 일 년이 가장 행복했다”고 허리 숙여 인사하였다고 한다.
서귀포의 노곤한 포구 저편으로 노을이 지고 있다. 한때는 사랑을 했거나 이름 모를 추억에 지쳐 정박하는 배들과 함께 노을도 이제 떠나고자 한다. 적멸로 물들어 가는 노을 앞에 섰다. 지는 노을을 바라보고 있으니 문득 이중섭의 다 피우지 못하고 꺼져버린 예술 정신을 보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