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필봉] 그 저녁의 퀘렌시아
정영자 / 수필가
지인에게서 ‘하우스 콘서트에 초대합니다’라는 문자를 받았을 때, 반가우면서도 의아했다.
야외 공연이나 동아리 연주회에서 가곡이나 세미클래식을 접해 본 적은 있었지만, 서귀포에서 하우스 콘서트는 처음이다.
18세기 프랑스 귀부인들이 살롱에서 지인들과 음악을 나누던 자리에서 비롯되었다고 전해지는 하우스 콘서트. 하지만 그날의 공연은 화려한 귀족의 취향과는 달랐다.
푸릇한 식물들이 숨을 고르며 생생하게 살아가는 농장. 창고를 개조한 실내는 천장에서 떨어지는 백열등 빛이 조촐한 무대와 오래된 오디오를 따스하게 감싸고 있었다. 벽에 걸린 베토벤과 카라얀의 초상이 주인의 음악 취향을 짐작하게 한다.
하나둘 모여드는 사람들은 어디선가 본 듯한 이들도 있었고, 처음 보는 이들도 있었다. 내 앞자리에 초등 6학년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 셋이 조심스럽게 자리를 잡았다.
클래식을 듣는 아이들, 조금은 의아하면서도 호감이 갔다. 이런 감정은 순전히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는 내가 좋은 쪽으로 몰고 가는 일종의 편견일 수 있지만, 어쩔 수 없다.
좌석을 정해놓지 않은 공간은 누구랄 것 없이 오는 대로 차례차례 채워나간다. 사람들이 움직이는 소리도, 오고 가는 말소리도 졸졸 흐르는 개울물처럼 편안하다.
어떤 곡이 연주될지 미리 알고 오는 이들은 음악의 기운에 심신을 담그고 잠시 쉬어가고 싶었을 것이다.
객석과 나란히 한 아주 가까운 무대에서 연주하는 모습을 보며 음악을 듣는 이 순간이 여기에 오는 이들에겐 어쩌면 ‘퀘렌시아’일 테니까.
스페인어로 ‘안식처’ 또는 ‘편안한 장소’를 의미하는 ‘퀘렌시아’는 마음이 편안해지고 치유되는 공간을 상징한다.
나에게 퀘렌시아는 좋아하는 클래식 음악을 들으면서 보내는 시간이다. 그 순간은 단순한 여가 시간이 아니라, 내 영혼이 재충전되는 소중한 시간이다. 클래식 음악은 그 자체로도 아름다운 예술 양식이지만,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클래식 음악을 들을 때마다 일상의 번잡함에서 벗어나 마음이 안정되며 위안을 받는다.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등 다양한 악기의 조화로운 소리는 보다 높은 이성의 세계로 이끈다.
바이올린을 들고 무대에 선 연주자는 신중하게 현을 켜기 시작한다. 마치 혼자만이 알고 있는 세계로 빨려 들어가듯이.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파르티타 제2번 중 제1악장 ‘알레망드’와 제4악장 ‘지그’를 연주한다. 떨림, 보일 듯 말 듯 아주 미세한 움직임을 마주한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거리여서 연주자 속눈썹의 미세한 떨림까지 내게 전해온다. 뒤이어 바흐의 무반주 첼로모음곡 제1번 중 제1악장 ‘전주곡’과 제4악장 사라방드’ 를 연주한다.
초가을 밤의 서정어린 분위기가 함초롬히 드리우며 낮고 둔중하게 울려 퍼진다. 잠잠한 나의 가슴에 쿵하고 내려앉는 푸른 침묵의 언어. 생생하다.
하얀 드레스를 입은 고상한 바이올리니스트와 달리 블랙의 편안한 차림을 한 첼리스트는 어딘가 투박하나 힘이 있고 소박한 정이 느껴진다.
곡에 대한 해설을 잠시 하는데 목소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당차면서도 온화하다. 바이올리니스트도 첼리스트도 흉내 낼 수 없는 저들만의 매력으로 무대를 장악한다.
이토록 조촐한 무대를 천상의 무대로 변신시키다니 이게 음악이 주는 선물이 아닌가.
화려하거나 격정적이지 않지만, 작은 공간 안에 숨결처럼 퍼지는 위안의 리듬은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순수한 영혼을 불러낸다.
연주가 끝나고 삼삼오오 차와 다과를 나누며 대화를 나눈다. 화려함과 수수함을 두루 섞은 듯한 이 분위기는 지극히 서민적이다. 클래식 음악이라는 것이 그리 어렵게 여길 것도 아니고 그저 함께 호흡하는 예술이라는 걸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느낀다.
그 자리에 있던 우리가 잠시 같은 파동 안에서 흔들리고 있었듯이.
이 순간, 음악이 멎었어도 가슴에 달고 온 파동으로 여전히 아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