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포칼럼] 마음으로 보는 숲 - 지나친 것은 모자람과 같다
이지영 / 환상숲곶자왈공원 대표, ‘숲스러운 사이’ 저자
11월은 빨간 열매의 계절이다. 청미래덩굴이 반짝이는 구슬처럼 숲 가장자리를 장식하고, 먼나무와 호랑가시나무에는 붉은 알갱이들이 가지마다 촘촘히 매달린다. 여름 내내 잎들 사이에 숨어 있던 초록 열매들이 마침내 자기 차례를 맞은 듯, 숲 속 여기저기에서 얼굴을 내민다.
빨갛게 익은 열매를 보며 아이들과 숲에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왜 열매는 빨갛게 익을까?’라고 물었더니 한 아이가 아직 다 물들지 않은 옆의 초록 열매를 가르키며 ‘이 열매는 초록색으로 물들었는데요?’라고 말했다.
문득 왜 열매가 초록색이었을까라는 질문은 해보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충분히 자라지 않았을 때, 아직 씨앗이 무르익지 않았을 때는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보호색으로 초록빛을 유지하고 있었구나. 먹히기 위해서 열매맺는 것이 아니라, 아직은 먹히지 않기 위해 초록으로 남아 있는 시간.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빨개지지 못한 것, 아직 덜 익은 것에 대한 마음이 조금 바뀌었다. 준비되지 않았을 때는 초록으로 있어도 괜찮다고, 기다려야 할 때는 기다려야 한다고, 숲이 대신 말해 주는 것 같았다.
며칠 전 저청초등학교 아이들이 숲에 찾아 왔다. 동네에 있는 학교라 워낙 여러차례 들리기도 했기에 이번 방문에는 숲해설을 하지 않고 가을의 볼 수 있는 식물 찾아오기 미션을 내 주었다. 더불어 숲을 산책하며 도토리를 주워오기 게임도 하였다.
“100g에 가장 근사치로 도토리를 주워오는 이에게는 선물을 드립니다.!”
라고 말하자 아이들 눈이 반짝였다. 이름이 적힌 봉투를 하나씩 나누어 주고, 가족별로 숲 곳곳으로 흩어졌다. 1시간 후 미션지를 확인하고 도토리 무게를 측정할 때의 모습이다.
의외의 장면이 펼쳐졌다. 부지런히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열심히’ 주워온 어린 아이들의 종이컵은 140g, 150g을 훌쩍 넘겼다. 척 봐도 300g은 넘어 보여서 덜어 낼 기회를 준 아이들도 제법 있다.
오히려 행사나 상품에 별 관심이 없던 고학년 아이들은 슬슬 걸어 다니며 눈에 보이는 것만 몇 개 주워왔다. 그렇게 대충 모은 것 같은 봉투들이 오히려 95g, 92g, 105g… 100g에 더 가깝게 나타났다.
저울 앞에 둘러선 아이들을 보며 문득 웃음이 나왔다. 열심히 모았다고 해서 항상 더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 많이 가진다고 꼭 맞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 정도면 되겠다’ 싶을 때 멈출 줄 아는 아이들이 더 정확한 숫자에 도달했다.
욕심을 부리기보다는 덜어낼 줄 아는 일.
숲은 자꾸 그 이야기를 들려준다. 지나치게 가지를 뻗은 나무는 바람 앞에 약해지고, 열매가 너무 많이 달리면 나무 스스로 열매를 떨궈 버리기도 한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더 많이, 더 높이, 더 열심히를 주문하기 쉽다. 좋은 의도에서 시작된 욕심이 어느 순간 무게가 되어 아이 어깨를 누르기도 한다.
숲길을 걷다 보면 천남성을 만날 때가 있다. 잎이 무성하던 여름이 지나고 난 뒤, 홀로 서 있는 빨간 열매가 특히 눈에 들어오는 식물이다. 천남성은 약재로 쓰이기도 하지만, 잘못 쓰면 독이 된다. 과거에는 사약의 재료로도 쓰였다고 전해진다.
같은 식물, 같은 뿌리인데도 쓰임새에 따라 약이 되기도, 독이 되기도 한다. 지나치게 많이 쓰거나, 잘못 다루면 몸을 해치는 독이 되지만, 적당히 다루면 아픈 곳을 덜어주는 약이 된다. “지나친 것은 모자람과 같다”는 말이 있다.
숲에서 만난 천남성과 아이들의 도토리가 겹쳐 보였다.
공부를 향한 열심, 아이에게 건네는 관심, 무언가를 잘하게 해주고 싶은 마음. 그 자체는 분명 ‘약’이 될 수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선을 넘기 시작하면, 천남성처럼 ‘독’으로 기울기도 한다. 좋은 약재라고 해서 한 움큼씩 떠먹지 않는 것처럼, 좋은 마음도 적당한 양과 거리가 필요하다.
빨간 열매의 계절, 숲은 알맞게 익은 것과 아직 익지 않은 것, 약과 독, 넘침과 모자람의 경계를 곳곳에 드러내 보인다. 새들에게 먹히기 위해 빨갛게 물드는 열매도 있지만, 아직은 초록으로 남아 숨어 있는 열매들도 있다. 각자 자기 속도로 익어가는 중이다.
숲은 언제나 지나치지 않는 법을, 서두르지 않는 법을, 준비되지 않은 것을 억지로 빨갛게 물들이지 않는 법을 가르쳐 준다.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쉼 없이 채찍질 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은 “지금 이만큼이면, 충분하지 않는가?”라며 만족하기도 하는 그런 연말이 되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