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학의 선구자 나비박사 석주명(35)

석주명이 근무하던 당시 경성제대 부속 생약연구소 제주도시험장. 정문이 현재는 북쪽에 있지만 당시에는 서쪽에 있었다. (사진=토평마을회지)
석주명이 근무하던 당시 경성제대 부속 생약연구소 제주도시험장. 정문이 현재는 북쪽에 있지만 당시에는 서쪽에 있었다. (사진=토평마을회지)

석주명은 제주도를 세 차례 방문하거나 체류했다. 첫 번째는 1936년 여름에 나비채집을 위해 1개월 남짓 체류한 바 있다. 두 번째는 1943년 4월 23일 경성제국대학 생약연구소 제주도시험장(일명 약초원)이 개장하면서 부임하여 1945년 5월 개성으로 복귀할 때까지 2년 남짓 근무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1948년 1월 30일부터 2월 6일간 제주도를 찾아 당시 제주신보에 실린 ‘조선의 자태’라는 글을 기고한 바가 있다.


석주명은 1942년 3월말 송도중학을 사직하고 7월경부터 개성에 있는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소속의 생약연구소에 촉탁연구원으로 들어갔다. 이는 1942년 7월 1일 ‘조선박물학회’ 회원명부에 그의 소속이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미생물학교실’이라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1943년 4월 24일 경성제대 부속 생약연구소 제주도시험장이 개장되면서 자청하여 벽지 근무를 자원하였다. 그는 1936년 여름 한 달 동안 제주도에서 나비채집하면서 제주의 독특한 자연과 문화에 강렬한 인상을 받은 바 있고, 자연과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제주도에서 사계절을 지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제주도시험장은 경성제대 의학부 부속이었다. 제주도시험장이 설립된 주된 목적은 약용식물과 아열대식물을 시험재배하는 것이었다. 석주명에 따르면, 시험장 개장 초기에는 디기탈리스 시험재배에 주력하였다. 강심제의 재료인 디기탈리스는 전시 부상자들을 수술할 때 반드시 필요한 약용식물이었다. 1944년 봄에는 제주도시험장을 둘러싼 1320미터 돌담 안쪽에 1미터 간격으로 동백나무 1230그루를 삽목하고, 아열대식물인 탱자나무, 감귤나무, 비파나무, 무화과나무, 올리브나무 등을 심었다. 지금도 시험장 울타리 주위에는 당시에 석주명이 삽목했던 동백나무 10여 그루가 남아 있다.


제주도시험장에서 석주명의 업무는 ≪제주도자료집(1971)≫에 실린  ‘목향(木香)의 재배시험(1943)’, ‘피마자의 재배시험(1943~44)’ 등의 글을 보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당시에 제주도시험장에서 석주명을 도운 이들은 서귀포 호근리 출신 김남운(1920~1998)과 토평리의 정성숙(1920~?) 등이었다. 특히 김남운은 석주명의 지도 아래 약용식물인 ‘목향’과 윤활유 재료로 쓰이던 ‘피마자’ 재배시험을 담당하고, 제주방언을 수집하는데도 도움을 주었다.


목향의 시험재배를 위해 개장 이전인 3월 13일에 정지작업을 하고, 퇴비를 주고, 모종을 심었고, 5월 11일부터 제초하고 잎과 꽃줄기를 따내면서 비교실험을 하였다. 석주명은 보고서에서 목향 뿌리 윗 부위에 잎을 각각 4매, 6매, 8매를 남긴 것, 꽃대 제거한 것, 씨받이 한 것 등을 비교한 후, 한번 시험으로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고 판단해서, 재시험하여 비교 후에 그 우열을 결정해야 한다고 적고 있다. 


‘피마자의 재배시험’은 2년에 걸쳐 이뤄졌다. 네 품종의 피마자를 재배했는데, 첫 해에는 인부의 실수로 두 품종이 뒤섞이는 바람에  일 년 더 시험한 후에 우열을 가려 보았다. 하지만 석주명은 진짜 좋은 품종을 고르려면 한 번 더 시험을 해봐야 한다고 제언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주요작물 파종량 비교표’에서 서귀포, 안동, 개성의 보리, 밀, 메밀, 조, 피, 콩, 고구마, 감자 파종량을 비교한 결과, 제주도는 보리 파종량만 다른 두 지역보다 많고, 나머지 작물의 파종량은 적다는 것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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