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한숙희의 '만남'…인생자체가 아름다운 소풍

내가 서귀포에 살면서 새로 붙힌 취미가 탁구이다. 오랫동안 오른손으로 마이크를 쥐고 강의를 한 탓에 오른쪽 어깨가 말려들면서 어느새 등까지 아파오는지라 고민이 컸다. 이중섭 거리에서 탁구장을 발견한 순간, 옳다. 왼손으로 탁구를 쳐보자. 그러면 오른쪽 어깨가 자연히 뒤로 젖혀질 테니 물리치료 효과도 볼 수 있으리라.

하루 일과를 마치고 저녁을 먹고 느지막히 탁구장에 가서 기계가 던져주는 공치기를 한 시간 쯤 하고 나면 스트레스도 풀리고 몸도 개운해지는 게 일석 삼조였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즐거움이 또 하나 있었으니 그건 이중섭 거리의 밤산책이었따. 뭍의 밤길은 항상 긴장되고 무서웠는데 이중섭 거리는 인적이 없어도 웬지 포근하고 아늑한 느낌이 들었다. 왜일까? 이 거리에 무슨 기운이 있는 걸까?

"혹시 시낭송회 안 가실래요? 오늘 저녁 일곱시,이중섭 거리에서요"

서귀포에 와서 새로 사귄 친구의 전화를 받는 순간 내 가슴은 뛰기 시작했다. 시? 시낭송회? 이게 얼마만에 들어보는 로맨틱한 단어인가. 어른이 되면서 돈걱정, 자식 걱정, 세상사는 일에 치이다 보니 시를 읽어 본 게 언제더라.

사춘기 시절 친구들을 따라서 갔던 문학의 밤, 거기서 시를 낭송하던 문학 소년, 소녀들, 시라는 단어는 마치 빨대처럼 나를 단숨에 빨아올려 40년 전으로 데려갔다.

시, 시낭송회,, 그것이 서귀포에 시퍼렇게 살아있다니, 이중섭 거리라구? 어쩐지 거기 뭔가 신비한 기운이 있는 것 같았어.

저녁을 서둘러 먹고 이중섭 거리로 나섰다. 대단한 데이트처럼 가슴이 설렜다. 이중섭 거리 초입의 삼각형 찻집에 섰을 때 내 입에서 아하! 소리가 터져나왔다. 이중섭거리 언덕을 다 내려오면 그 집을 만났다. 대부분 문을 닫은 늦은 밤에도 테이블에는 손님이 두어명 앉아 있고 어떤 때는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이 보이기도 해서 늘 호기심을 자극하던 그 집, 그 집을 들여다보는 것이 내 밤산책의 마지막코스였던 것이다.

스무명이나 될까? 무대가 있는 조그만 삼각형 공간에 사람들이 무릎을 맞대고 빼곡이 앉았다. 단칸방의 아늑함과 정겨움이 느껴졌다.

“오늘의 주제는 그리움입니다.” 내 옆에 있던 이가 신참자인 나를 배려하여 나지막히 속삭여주었다. 그 말투가 시낭송 같았다.

두 사람이 낭송을 마치고 내 앞에 앉은 얌전한 여자가 일어났다. 화가라고 했다.

“저는 오늘 윤동주 님의 서시를 낭송하려 합니다.”

나는 그만 온 몸에 소름이 쫙 끼치고 말았다. 중학교 3학년때 바이올린을 전공한 20대의 여자 음악선생님이, 센치한 사춘기 소녀들의 로마이었던 그 선생님이 칠판 가득 써놓고 우리에게 낭송해주며 외우게 하셨던 그 시였다, 내 인생에서 가장 순수하고 행복했던 시절이 그 시속에서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제법 긴 시낭송 내내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나에게 속삭였던 이가 가만히 휴지 한 장 내 손에 쥐어 주었다. 경험자만이 해 줄 수 있는 배려, 그의 마음도 한편의 시였다. 시 낭송에 곁들여 하모니카 연주와 섹스폰 연주까지 듣고 모든 것이 다 끝난 후 나는 완전히 뿅간 상태가 되어 있었다.

집까지 어떻게 걸어왔는지, 구름 위를 걷는 듯 둥둥 뜬 이 기분, 얼마만인가. 세상이 아름답고 세상 사람들이 모두 사랑스러워 보이는 이 기분, 이 나이에, 살짝 우울증까지 있던 마음이 이렇게 촉촉해지다니! 시는 위대하다, 그런 시를 요리처럼 사람들에게 대접한 시낭송회는 더 위대하다.

슬그머니 찻집 주인이 궁금해졌다.

“에술인은 아니고 예술을 좋아하는 사람이예요, 사람들이 다 먹고 사느라 바빠서 잠시 잊고 있을 뿐이지, 예술을 사랑하는 것은 인간의 본마음이 아닐까요. 저도 우울증이 걸려 육신의 병까지 왔는데 이걸 차리고 여기서 예술을 사랑하는 순수한 사람들을 만나며 살다보니 모든 병이 다 나았어요.”

세상에! 에술로 심신의 병을 고친 선배가 여기 계셨구나.

“관광객 중에도 찻집에 들어와서 무대와 마이크를 보곤 ‘노래해도 돼요?’하는 사람이 있어요. 손님 전원이 동의하면 하시라고 하죠. 저는 이 공간을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요. 그래서 영업적으로 되든 안 되든 이 공간을 문화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사랑방처럼 열어두자는 초심을 지키자고 스스로 다짐을 합니다.”

아침 8시반부터 밤 12시 가깝도록 찻집을 여는 이유도 사람이 그리워 찾아오는 단골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라고 했다. 이중섭 거리의 수수께끼, 그 어둔 밤이 무섭지 않고 포근했던 이유는 이렇게 정다운 등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참 이상하죠, 관심없던 사람들도 여기 오게 되면서 시와 음악을 좋아하게 되었다고 말하니까요. 예술을 사랑하고 사람을 좋아하는 순수한 사람들을 만나 벗으로 삼아 살아갈 수 있다니 저는 정말 행복한 사람입니다”

자기를 정말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될까. 슬그머니 그가 부러워졌다.

“아무때나 지나다가 들르세요. 앉아있다보면 누구라도 만나게 되거든요, 그렇게 사람들과 소풍하다 가는 것이 인생아니겠어요?‘ 12월 27일에는 꼭 오세요. 솔동산 음악의 밤을 열꺼예요”

낮에는 자연이 만들어 준 아름다운 풍경, 밤에는 예술을 나누는 아름다운 사람들, 서복이 구해간 불로초는 약초가 아니라 서귀포 사람들이 키워 온 예술혼이 아니었을까.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말이 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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