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한숙희의 [만남]

무슨 색을 좋아하세요?
글쎄요.
머릿속에는 여러 가지 색이 맴돌았는데 딱히 이거다 하고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럼 테스트를 좀 해볼까요?
그분은 여러 가지 색깔이 모여있는 종이판 위에 내 손을 올려놓고 다른 손 위에는 작은 추를 드리웠다. 하늘색과 흰색 등 연한 색이 주로 있는 종이판 위에서 손을 놓자 추가 뱅뱅 돌았다.

여름 사람이시네요. 시원한 느낌의 색이 당신에게 에너지를 주는 색입니다.
아하! 그랬구나. 나는 내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작년 봄 핸드폰 케이스를 사려고 가게에 들어갔을 때 첫눈에 반해 두 말 않고 사 가지고 와서 지금까지 실증내지 않고 쓰는 것이 바로 하늘색이다.

아이들은 누구나 자기가 좋아하는 색을 알아요. 어른들은 남의 눈에 멋있어 보이는 색, 유행하는 색을 따르다 보니 진짜 자기가 좋아하는 색을 잊어버린 거지요.
갑자기 억울해졌다. 그 오랜 세월 내 색을 잊고 살았다니, 그러나 누굴 탓하랴. 자기 속을 챙기지 못하고 살아온 내 탓인 것을.

자, 이제부터 내 색을 찾아보자. 내가 어릴 적에 좋아했던 색은 무엇이더라. 음, 역시 하늘색이 으뜸이었다. 그 다음이 흰색, 그리고 연분홍, 그러다가 번개같이 한가지 색이 눈 앞에 선명했다.

몇 일 전 올레 5코스를 걷다가 본 바닷물빛이었다. 바닥에 하얀색 모래가 깔린 부분의 물빛은 하늘색이라고 하기에는 녹색이 느껴지고 녹색이라고 하기에는 파란기운이 느껴지는, 그렇다고 두 가지 색을 섞었다고 할 수도 없고, 보통 옥빛이라고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성에 안 차는, 도무지 딱 맞는 이름을 찾을 수 없어 뇌가 간질간질한 아주 오묘한 색이었다.

발이 떨어지지 않아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일행의 독촉만 없었다면 해가 지도록 들여다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을 것이었다. 그게 나의 색이었던 것이다.

아, 그 물빛이 나를 제주섬 서귀포로 이끌었구나. 내가 거기 끌려 예까지 나도 모르게 오게 된 것이로구나. 색깔도 인연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니 참 재미있고 신기했다.
그분이 색채심리에 눈을 뜬 것은 순전히 직업 덕이었다.

똑같은 색깔로 머리카락을 염색하는데 어떤 사람은 아주 고상해 보이는데 어떤 사람은 너무 독해 보여요. 메이크업도 같은 색조인데 어떤 사람은 신비해 보이고 어떤 사람은 초라해보여요. 도대체 이게 뭐냐? 30년동안 물음표였어요.

색채라는 글씨가 들어간 책을 모조리 구해 읽으면서 색이 인체에 영향력이 있겠다는 생각에 닿았다. 너무 신기하고 매력이 있어서 관련분야의 전문가라는 분들에게 적지않은 돈을 주고 공부를 했다. 결론은 자연의 계절색이 사람에게 에너지를 주는 색이라는 것과 사람마다 필요로 하는 색이 제 각각 있다는 것이었다.

우선 자신과 가족들에게 적용을 해보았다. 책상에 앉기 싫어하던 아들에게 자기 색의 책상과 책상보를 해주자 기가 막히게 책상과 친해지며 집중력과 안정감이 생기는 것을 체험했다.

어른들도 자기 색이 있는 곳에서는 오래 머물러도 피곤하지 않고 오히려 힘을 얻는 것을 경험했다. 처음에는 이 우주의 비밀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아는 사람마다 이 색은 되고 저 색은 안 된다고 아주 심하게 권했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지금은 아는 사람에게도 조심스럽다. 그들이 필요로 할 때까지 기다릴 뿐이다. 봄이 가야 여름이 오고 여름이 가야 가을이 오는 것이 자연이듯이, 자연의 색에 눈을 뜨면서 자연의 이치에 따라 살게 된 것이리라.

자연이란 있는 그대로 보는 거예요. 부모의 잣대로 보는 게 아니라 아이를 관찰해 주는 것, 그래서 아이에게 필요한 언어, 아이에게 필요한 환경을 알게 되는 것, 그게 사랑이죠. 아이를 자연스럽게, 있는 그대로 보면 모를 게 없어요. 장점도 다 보여요. 그런데 부모들이 자기 생각의 색안경을 껴버리면 왜곡해서 보기 때문에 착각해서 아이의 장점을 놓쳐버리는 거죠. 부부도 색이 다를 수 있어요. 그걸 서로 인정하고 존중해주면 아무 문제가 없어요.

있는 그대로 보기! 그것이 사랑이라니! 있는 그대로 보기!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가장 쉬운 길! 이건 대단한 통찰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있는 그대로 보며 살고 있을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요구하고 강요하고 그걸 들어주지 않으면 섭섭하고 속상하고 화가 나서 견디지 못하는 내 모습이 보였다.

집으로 돌아와 옷장을 열어 보았다. 기껏 사다 주었더니 입지 않는 딸아이의 옷과 내 생일에 선물로 받아놓고 안 쓰는 스카프가 나란히 걸려있었다. 내 눈에 예쁜 것이었지, 딸아이와는 맞지 않는 것이었구나. 섭섭해하기 보다 미안해할 일이었네.

즐겨 입지 않는 옷들을 접어 박스에 담았다. 아름다운 가게에 갖다주자. 누구라도 좋아할 사람과 나누면 나는 가벼워지고 이 옷들도 제 몫을 하고 일석이조 아닌가.

가게로 가는 길에 한라산이 보였다. 하늘색과 짝지은 눈덮힌 하얀 한라산, 저 자연의 색이 서귀포 사람들을 착하게 만들고 있는 거겠지. 주황색 감귤과 검은 돌과 함께.
나에게 색을 통한 깨달음을 전해준 그분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내가 아는 것을 나눠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니 행복하죠. 살아가는 가치를 느껴요. 서귀포를 환하게 밝히는 게 제 사명 같아요
자연, 있는 그대로 보기, 나누기, 자연을 닮은 사람들, 서귀포 칠십리는 환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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