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마을 촌로의 되돌아본 인생]윤세민/교육자

▲일본군이 주둔했던 녹하지 근처에 남기고 간 군용마차는 면사무소에서 일괄 인수받아 마을에 배정돼 공용기구로 농사에 이용했다. 군용마차는 전략물자를 운반하는데 일본군이 사용해 왔다. 이 때 각 마을에서는 순번에 의해 소를 끌고가 녹하지 군부대에서 1주일정도 부역했다. 이때 진지구축에 부역 당한 어른들이 말을 들으면 포대도 제주의 돌담묘소로 위장해 사방에 총구를 냈다며 기묘한 전술이라며 기존 분묘와 식별하기 어렵다며 후일에 묘주들이 혼돌할것이라며 걱정하는 말을 들었다.

당시 농촌에 운반기구란 우마(牛馬) 등에 의존해 왔으며 때로는 등짐으로 나르기도 했다. 이때 쇠바퀴 마차를 얻게 됐으니 요즘 같으면 고급 승용차 사들인 것과 같이 농가에서는 최신 무동력기였다. 6.25이후에 군용트럭 타이어가 시중에 나오면서 무용지물이 돼버렸다. 오랫동안 방치됐던 이 철제 마차는 최근에 골동품이 돼 우리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다.

▲사병들 가운데는 가족이 그리워 귀국일자를 고대하고 있었다. 패전소식을 들은 고급장교는 진중에서 할복 자결했다는 풍문이 나돌았으나 일본의 무사도(武士道)로 봐 당연 있을 뻔 일이라며 그리 놀래지 않았다. 귀국직전에 아버지를 만나려 장교 세분이 찾아왔다.

아버지는 당시 마을 이장 직을 맡고 있어 마을사람들이 우영팟(텃밭)에서 가꾸어 온 채소류, 어부회에서 구매해 간 자리 돔 한말값 등, 사소한 금액이지만 이 판에 허명(許溟)의 문서가 되는 것이 아닌지 의아해 댔다. 그러던 와중에 현지 조달해 준 물품대금을 정산하려고 경리담당 사병을 대동해 온 것이다. 장교는 대좌와 위관 급이었다. 사소한 토종 물 오이 한 개, 호박 한 덩어리 값도 완불하고 귀국하는 일본군의 청렴성과 한 푼의 착오 없이 끝마무리하는 것을 봐 주민들은 감복해 떠난 후에도 가끔 모여 앉으면 우리들에게 돈거래를 깨끗하게 마무리하는 일본사람들의 후담이 오랫동안 이어와 애들까지도 귀담아 듣고 했다. 아버지와의 대화내용을 곁에서 귀담아 들었다.

긴 닛본도(日本刀)를 찬 대좌(대령)는 시퍼런 칼을 뽑아 들고 하는 말이, 이 칼은 우리가문의 가보이다. 할아버지가 일로(日露)전쟁에 노기(乃木) 대장 부하로 참전했다. 그래서 대대로 내려오는 승전의 칼이다. 출전 시에 아버지로부터 "대동아 평화를 위해 적군의 목을 베라"며 건네주더라는 말을 듣고는 일본의 무사정신에 전율이 돌았다. 일본 명문 무가에는 지금도 일본도를 가지런히 진열해 무사정신을 전승시키고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 일본도로 미군 놈 목을 쳐보지도 못하고 가는 것이 분통하다며 일본의 야마도 다마시(大和魂) 기혼을 토로하고는 작별인사를 하고 올레 목에 이르니 그 일본의 야마도 무사(武士)정신이 발로했는지 순식간에 장도를 뽑아 들어 "얏"하는 기합을 넣어 늘어진 어른 팔목 크기의 나무 가지를 베어버렸다. 베인 나뭇가지를 주어보니 일본도는 면도날과 같이 날카롭다는 것을 알았다. 요는 기합의 위력도 있어 그랬을 것으로 안다. 그렇지 않아도 이 나무는 우마가 비비는 통에 쇠퇴하던 차에 겁먹어 고사되고 말았다. 조석으로 드나드는 올레 목에 들어서면 지금도 그 기합이 귓가에 들려온다. 그런가하면 며칠 전에 업무연락 차 온 사병(최근에 소집영장을 받은 노병)은 묻기도 전에 사랑하는 가족들을 만나게 돼 기쁘다며 만면에 희색이 연연해 보였다. 나이가 들수록 인지상정은 더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패전되자 서귀포에 거주하고 있던 일본인들은 불안해서 하루라도 빨리 귀국하려고 서둘러 언제 가는지 눈치 채지 않고 민간 선박을 대절해 집단으로 귀국했다고 떠난 후에야 자기도 알았다며 동료 학생이 말해 줘 알게 됐다. 8월 하순경에야 다니던 학교 사가다(澤田)교장을 잊을 수 없어 서귀포 교장 사택에 갔다. 고마운 선생님은 가족을 데리고 이미 떠나 버린 집이라 허전했다. 일본인들이 악랄하게 한국인을 구박하고 차별해 원한을 살 정도는 아니었다. 패전 후 일본인들은 자숙하는 태도로 대인접촉을 피해왔다고 한다. 정보부재로 조국광복의 기쁨에 들떠 있을 뿐 민심을 주도할 지도자나 조직단체가 없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자기네가 살던 집을 임시 넘겨주면서 다다미(?)방 만큼은 헐지 말고 그대로 두라고 했다는데 그 저의는 무엇인지 또 이 땅을 짓밟으려는 것인지 아마 짙은 향수에서 남긴 여운이 아니었는지 생각된다.

그런데 조선의 마지막 총독(1944.7.24~1945.9.28)이던 아베노부 유끼(阿部信行)는 떠나면서 섬뜩한 말을 남겼다. "우리는 패했지만 조선은 승리한 것이 아니다. 장담하건데 조선 사람이 제 정신을 차리고 찬란하고 위대했던 옛 조선의 영광을 되찾으려면 100년이라는 세월이 훨씬 더 걸릴 것이다. 우리 일본은 조선 사람에게 총과 대포보다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 놓았다.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적 삶을 살 것이다. 나는 다시 돌아온다." 곱씹어볼수록 이상 야릇한 생각이 든다.

조선총독이 항복문서에 서명하기가 9월 28일에야 이루어졌다. 그러니 무장 해제되지 않아 일본군은 전의는 상실되고 있었지만 건재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민폐는 없었다. 그네들이 내 걸었던 "내선일체" 시책을 펴느라고 요 며칠 전까지도 발광해 온 탓인지 반일 의분이야 들끓고 있었지만 촉발하지 않았다. 도망가는 자에게는 퇴로를 내어주라 그리고 활을 겨누지 말라는 선인들의 가르침이 있어 그랬는지 너무나도 평온했다. 일본군 철수도 순식간에 이루어져 그토록 웅대했던 숙영지는 일시에 삭막한 들판으로 변모해버렸다. "패자는 말이 없다" 전의가 상실되면 군인이 아니었다. 말로를 지켜보면서 조국의 앞날을 그려보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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