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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서귀포 살던 일본인들의 비화(2)[강정마을 촌로의 되돌아본 인생]윤세민/원로교육자
서귀포신문 | 승인 2015.09.23 09:10
   
 

◆관광서 장을 비롯해 특권을 누리는 인허가 사업, 심지어 시시한 주류 판매업, 식량배급소 대서소 오사카(大阪) 등지로 왕래하는 화물 여객선 군대환(君代丸) 매표업무 까지도 모두 일본인이 독점했으나 한국인 상권도 이에 맞서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남주(南洲) 강석인 선생의 남부 여객차부, 소규모 통조림 공장, 소라 전복 껍질을 이용한 가내 수공업인 단추공장, 전분공장 등을 들 수 있다. 일명 술 공장으로 불렀던 양조장도 있어 높은 굴뚝에서 연기가 내 뿜고 근처에 가면 발효 향이 풍겨왔다.

1944년쯤에는 곡물부족으로 조업이 중단되고 말았다. 당시 솔동산 거리에는 잡화사회 서점 약포 사진관 등 점포가 즐비하게 들어선 번화가이었다. 상권은 한국인이 독점하고 있었다. 요식업소는 솔동산 내리막길에 중국인이 경영하는 반점이 유명해 그 앞을 지나려면 면발을 뽑기 위해 쳐대는 소리와 양파 볶아내는 내음에 매료돼 행인들은 자극돼 쳐다 볼 뿐 선뜻 들어서지 못했다. 지금의 덕성원 원조가 아닌가(?).

접객업소로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일본식 목조건물 2층으로 된 고지마(小島)요광(여관), 고(鄕)요광 두 곳이 있었지만 투숙객을 맞는 데는 차별하지 않았다. 솔동산에 있는 순홍여관은 군대환에서 내린 한국인이 하루 밤 묵고 가던 여관이었다. 일본인 여관 다다미 방이 아니라 온돌 구들방이라 군대환이 기항하는 날에는 밤새 교향 가족의 정겨운 만남의 장이돼 구수한 시골 향취가 물씬 풍겨댔다.

고(鄕)요강은 경영주의 외자 성을 따서 고(鄕)요광(여관)이라 불렀다. 여기 따님이 필자가 재학하고 있던 남 소학교 여선생님이라 여관에 가는 일이 종종 있었다.

한국인 학생 동태파악인지 좋게 봐 교외 생활지도인지 토요일 집에 다녀오면 일요일 저녁 귀성 신고하는 것이 교칙으로 돼 여간 귀찮았다. 평소에 해보지 않던 일본 예법에 따라 정좌하면 발목이 아파 여간 곤욕스러운데 부모님 동정까지 꼬치꼬치 묻는 통에 진땀이 났다.

한 가족정신으로 일심동체가 된다는 교육 방침이라 아마 우리들과의 친화력을 조성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그네들이 내건 대동아 공영권 건설 운운하던 전쟁은 패색이 점점 짙어져갔다. 밤에는 등화관제로 길거리는 암흑가로 변하고 공습경보 사이렌이 울리면 학교를 사수한다며 달려가 구린내 나는 방공호 신세. 토, 일요일은 전폐돼 월, 월, 화, 수, 목, 금, 금요일로 대체해 버렸다.

주말에 고향집에 다녀오는 것이 우리들에게는 유일한 재충전의 기회이었지만 귀성보고 없어지니 한편 무거운 짐짝을 내려 논 기분이라 시원섭섭했다. 없어진 토, 일요일에는 호국봉사 깃발을 들고 삼매봉 포대구축에 동원돼 진땀을 흘렸다. 그렇다 멀리 보이는 고향 마을을 보는 순간 누구를 위해 이 포대를 구축하고 있는지 회의감이 들었다.

이때 일본군 노병(재 소집돼 온 사병)이 와 보리 건빵을 나누어주며 찼던 수통 물까지 주던 그 온정에 우리들은 여간 감복했다. 전장에도 한 송이 꽃이 피는 정겨운 시간이었다.

당시 일본 군인들이 전장에서 부르던 애창곡이 있었다. 이 노병도 담배를 한 대 빨고 연기를 내뿜더니 "온시(恩師)노 다바고 이다다이데(은사님의 보내준 담배를 받아들고)" 애창곡을 불렀다. 우리들도 학교에서 배운 노래라 함께 불렀다. 삼매봉에 난데없는 메아리에 텃밭 까마귀 떼도 놀라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백발 노장(老壯) 사이고(西鄕)

서귀 항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부두 동산에는 일본식 목조건물 한 채가 있었다. 정원에는 고래아귀 뼈 아취가 세워져 행인들은 누나 할 것 없이 눈여겨봤다. 여기에는 백발이 싱싱한 사이고 노인이 살고 있었다. 슬하 자녀들은 모두 본국에 두고 왔는지 부부만이 노후생활을 만끽하면서 일본인들에게는 정신적으로 귀감으로 존대를 받는 노장이었다.

남 소학교 설립 이사장(후원회장) 직을 맡고 있어 학교 행사에는 앞자리에 선생님과 나란히 앉혀 원로예우를 받았다. 일본인 재향군인 월례회에서는 역전의 전공 담을 피력하는 모습이 마치 기력이 왕성한 청년 장교와 다름없었다.
지켜보던 일본 애들은 부모님들이 하시는 말씀이, 일로(日露)전쟁 승전보를 울린 노기(乃木)대장 예하 부대장으로 참전했던 역전의 용사 할아버지라며 그 어른 지에는 지금도 차고 나갔던 일본도(日本刀)가 다다미 방 상단에 놓여 있다며 자랑해 댔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섬직한 생각이 들었다. 칼 들고 침략한 자는 반드시 패망한다는 역사의 교훈을 저버린 자라며 되묻고 싶었지만 또 조센징(조선인)이라 할까봐 말문이 막혔다. 나라 잃은 슬픔은 이때만이 아니었다.

이 노인 정원에 있는 고래 뼈 아취와 비슷한 것이 학교 풍치림에도 있었다. 아마 고래공장 부산물에서 나온 것을 조형물로 세워 논 것이었다. 일본 애들은 이 문은 행운의 문이라며 자주 들락거렸다. 일본사람들은 액운을 막아준다는 발상에서 세웠다는 풍문이 돌았다. 우리에게는 끔찍한 혐오시설이라 야밤에는 근처에 가지도 않았다.

지금은 해상관광유람선 선착장이고 새연교 시발지점에 고래공장이 있었다. 1940년까지는 포경선이 원양조업에서 포획한 고래 등살에 깃발을 꼽아 고동 울리며 입항하는 장관을 해안가 마을에서는 종종 볼 수 있었으나 고래 고기는 일본인이나 특수층 관리 식탁에는 올랐으나 우리들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이런 와중에 필자는 먹을 복이 있었는지 한국인 순사 아들이 고래고기를 도시락 반찬으로 갖고와서 자기는 구미에 맞지 않는다며 내 도시락 마늘장아찌 반찬하고 바꿔 먹은 것이 난생 처음 고래고기를 맛 본 것이다. 전쟁이 나면서 미군 함정침공을 방어하기 위해 매석된 기뢰(機雷) 등 많은 위험요인으로 조업이 중단되고 말았다. 지금도 연로 층에서는 고래공장 터라 불러지고 있다.

◆사라호 태풍 때 한 몫 본 고래공장 목조건물

고래공장 목조건물은 임자 없는 건물인지 오랫동안 방치돼 풍파에 지붕이 날리고 한편으로 기울려져 멀리서 보기에도 흉물이라 자연경관이 훼손되고 있었다. 휴지조각도 때로는 요긴하게 쓰이듯이 1959년 초 강력 태풍 사라호(sarah)피해는 막심했다. 관내 학교건물 피해상황을 문교부 재해 공제회에 보고하는데 건물 피해 입증 사진자료로 요긴하게 써 많은 예산을 따왔다는 말에 기발한 착상이었다는 입 소문이 항간에 돌았다. 적산 건물이라 종적 없이 없어지고 말았다.

서귀포신문  sgp199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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