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한숙희의 [만남]

“우와, 저 감 좀 봐”

시장 입구 길가의 좌판을 지나다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나무로 만든 과일궤짝 위 동그란 플라스틱 그릇에 얌전히 올라앉은 아이주먹만한 열 서너개의 연시, 하나같이 탱글탱글하기가 마치 풀잎 끝에 맺힌 이슬같이 어찌 귀엽고 이쁜지. 감나무에 달린 감들을 보면서 ‘아, 예쁘다’ 소리친 적은 여러 번 있었지만 이렇게 따놓은 감에 매료되기는 처음이었다.

 그 감들은 색깔도 아주 특별했다. 좌판위에는 감 중에 최고라는 대봉감도 있었고 껍질을 깎아 먹는 단감도 있었지만, 작은 연시들의 진홍색은 ‘이것이 진정 감색’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리 작은 것들이 어쩌면 이렇게도 깊은 빛깔을 머금고 있을까. 연시감에 한참 홀려 있는데 같이 간 친구가 내 옷소매를 끌어당겼다.

“감은 맨 나중에, 시장에서 나오면서 사는 게 좋아. 연시는 조금만 눌려도 터지니까...”

 사실, 나는 감이 먹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만약 먹고 싶었다면 달랑 두 바구니밖에 안 남은 그것이 팔릴까봐 미리 돈을 내놓고 시장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그 감들은 이상하게도 내게 먹을 것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시장에서 늦은 점심으로 팥죽을 먹고 내게 맞는 겨울 바지를 찾아 옷가게를 둘러보고 나오니 두 시간이 훌쩍 흘러가 있었다. 주차장에 빼곡한 차들을 피하느라 정신없이 걸어 시장을 빠져나온 내 눈에 그 ‘아이들’이 다시 들어왔다. 나는 누가 부르기라도 한 것처럼 그 앞으로 다가갔다.

 “사가세요. 올해 마지막 감입니다.”

 옆에 세워져있는 트럭에서 연륜 있어뵈는 아저씨가 다가왔다.

“마지막 감이요? "

 나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무슨 근거로 마지막이라고 단언하는가?

“이거 자연시입니다. 저절로 익은 거죠. 씨도 없어요”

자세히 살펴보니 감들 위에 검은 점이 한 둘씩 있었디. 햇볕에 노출되면 얼굴에 나오는 기미나 주근깨처럼 노지 출신 감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점이었다. 어릴 적 감을 먹을 때가 생각났다. 꼭지를 뗀 자리에서 껍질을 한 오라기를 잡고 살살 당기면 비닐보다도 얇은 껍질들이 벗겨져 일어난다. 이걸 한번도 안 끊기게 벗겨내는 시합을 언니들과 하는 것은 감을 먹는 또 하나의 재미였다. 그런데 이 벗기기 시합의 복병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이 검은 점이었다. 얼핏보면 별거 아닌 것 같지만 검은 점은 제법 단단하고 과육에까지 닿아있어서 껍질과 함께 벗기기가 쉽지 않았다.

 “에이 씨, 돌에 걸렸어”

 길게 늘려 온 껍질이 거기 걸려 끊어질 때면 나는 달리기를 방해한 돌이라고 원망을 해댔었다.

 “자, 마지막 감이니까 내가 두 바구니에 오천원에 해드리지.”

알이 잘아서 그런지 감값은 여물기나 빛깔에 비해 아주 쌌다. 엽렵한 주인은 비닐봉지 밑에 두툼한 종이 박스조각을 깔고 거기 아이들을 차곡차곡 앉혔다. 묵직했다. 그 이쁜 아이들을 내가 다  끌어안게 되다니, 뿌듯했다.

 “이제 올해는 끝이다”

아저씨가 어느새 좌판에 붙어있던 ‘씨없는 연시감 3000원’이라고 쓴 종이를 뜯어 손에 들고 혼잣말처럼 하고 있었다.

 “그럼, 내년에 만나는 거예요, 아저씨?”
 “허허허, 그렇죠”

저 아저씨는 감장사가 아니라 가을의 요정일지 몰라. 감이라는 이름의 가을 구슬을 이렇게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다니는 가을의 요정말야. 차 타는 곳까지 걸어오며 내 가슴속에 저절로 가을동화가 쓰여지고 있었다.

 갓난 아기 엉덩이처럼 통통하고 투명한 연시아기들을 탁자 위에올려놓고 하루밤을 잤다. 밤새 비가 왔다더니 일어나니 날씨가 바짝 추워져 있었다.

 “오늘부터 겨울이다”

 지나가는 사람이 핸드폰으로 누군가와 하는 얘기를 듣는 순간 나는 소름이 돋았다.

“올해 마지막 감입니다. 이제 올해는 끝이다”

정말이었구나. 그 아저씨 말대로 어제가 올해의 마지막 가을이었구나.
탁자에 얌전히 앉은 감구슬들, 가을의 요정이 주고 간 선물, 감을 한올한올 벗긴다. 돌에 걸려 끊어지지 않게 조심조심. 그리고 천천히 입에 넣어 녹인다. 감이 부드럽게 목을 타고 넘어간다. 가을이 내 몸으로 들어간다. 감 하나, 감 둘, 감 셋, 가을이 내 몸 속에 물든다.

“나이테 하나가 또 만들어지고 있구나, 쉰 여섯 번째 나이테가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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