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대, 1차 대전 당시 동맹국인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전선의 상황이 나빠졌을 때의 이야기다. 베를린의 독일 사령부에서 오스트리아로 전보를 보냈다. ‘우리 쪽 전선은 상황이 심각하지만 파국적이지는 않다.’ 오스트리아가 답신을 보냈다. ‘우리 쪽 전선의 상황은 파국적이지만 심각하지는 않다.’ 슬라보예 지젝이 볼 때 현재 인류가 처한 상황은 후자와 같다. 사람들은 환경파괴로 인한 전인류적 재앙이 머지않았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제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고 있다는 것. 파국적인 상황을 심각하게 여기지는 않고 있는 것이다.
파국적인 재앙을 앞둔 상황에서는 재활용 쓰레기 분리수거 같은 행동들은 거의 미신에 가까워진다. 실제 자연 회복에 기여하기보다는 자기위안의 측면에서 더 큰 의미를 지닌다. 지젝은 그런 미신적 행위로 위안을 얻는 것보다 직접적이고 급진적으로 제품의 생산 방식과 자본주의사회의 생산 구조를 바꿔나가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들은 역사적으로 대부분 실패해 왔다. 굉장히 많은 이들이 급진적인 환경운동가들을 자기 자신과는 거리가 먼 이상주의자로 취급한다. ‘저렇게 반대한다고 막을 수 있겠어?’ 파국이 코앞에 온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지젝은 근본생태주의(또는 심층 생태주의. 서양의 이원론적 세계관이 담고 있는 인간 우월주의를 비판한다. 인간이나 모든 생명이 평등하다는 생명 중심적 평등biocentric equality사상과 타인과 동식물은 물론 지구에 이르는 모두를 하나로 인식하는 자기실현self realization에 도달해야 한다는 규범을 지닌다.)에 입각한 환경운동이 영성을 강조하는 측면에 대해서도 거침없이 비판한다. 지구자연을 어머니로 상정하고 그러한 은유의 틀을 토대로 세상을 읽어내려는 시도들은 ‘종교를 대체하는 새로운 아편’에 취한 탓이라는 것이다. 지젝은 자연에 대한 낭만적인 종교화를 비판한다. 본래 자연은 인간에게 무관심하며 무자비하다. 지젝은 ‘자연은 지속가능하지 않다’고 말한다. 환경보호론자들이 모토로 사용하곤 하는 ‘지속가능성’이란 말이 실은 성립불가능한 말이라는 것이다. “자연은 절대 ‘지속가능’하지 않으며, 단지 쓰레기를 생산하는 거대하고 무분별한 과정에 불과하다”고 꼬집는다. 근본생태주의는 자연과 인간의 정확한 위치와 입장을 놓친 이데올로기라는 것이다.
지젝이 사회 문제들에 대해 어떤 구체적인 해답을 내놓는 것은 아니다. 지젝은 역사적으로 다양하게 제시되었던 ‘해결책’들마저 많은 문제들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변증법적 분석을 통해 확인한다. 지젝은 보다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을 지연하고야 만다. 인류의 처지에 대한 낙관 역시. “역사적으로 볼 때 우리가 스스로를 얼마만큼 구제할 수 있을지에 대한 해답은 명확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달려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굉장히 어려운 시기에 진입해 있고 종전의 방식으로는 대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파국적이지만 심각하지는 않은 상황, 곧 심각한 재앙이 온다고 하는데 모두가 웃고 있는 상황. 어쩐지 익숙한 상황이다. 바로 지금의 제주야말로 그런 상황이 아닌가? ‘종전의 방식’이 아닌, 새로운 대응 방안을 찾아내야 한다. 한국에서 진행한 인터뷰와 강의록을 모은 이 책에서 슬라보예 지젝이 말하듯이 우리 스스로를 구제하는 길은 결국 ‘우리에게 달려있다’, 제주도민에게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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