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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은 시인의 風景] 푸른 식탁
서귀포신문 | 승인 2016.11.17 09:58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으로 준다는 이야기가 있다. 인간관계의 유대감이 중요하다는 얘기다. 관계의 소중함을 강조하는 말이기도 하다. 친한 사람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 기쁨이나 슬픔 같은 감정뿐 아니라 만병의 근원인 스트레스 호르몬 분비가 확 줄어든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사람과 가장 가까운 침팬지의 경우, 친구랑 있으면 스트레스 호르몬이 크게 줄었다고 연구를 이끈 애리조나주립대 케빈 랜저그레버 교수는 논문에서 말한 바 있다.

인간이 맺는 관계를 끈으로 비유하기도 한다. 가족이나 친지 같은 혈연을 빼고 나면, 가장 튼튼한 끈은 친구가 아닐까 싶다. 표의(表意)를 특징으로 하는 인디언 말로 친구는 ‘나의 슬픔을 등에 지고 가는 사람’이다. 그 말 그대로 나의 슬픔을 대신 지고 가는 친구를 둔 사람은 어떤 보석보다 값진 보석을 지녔음에 틀림없다

오래 전, 사계에 있는 해안도로를 다녀온 적이 있다. 꼭 보여주고 싶은 곳이 있다고, 고등학교 때 친구가 데려간 곳이다. 송악산으로 가는 길 중간에 내리게 한 친구는 바다 너머를 가리켰다. 햇살에 반짝이는 금물결 너머 운무에 둘러싸인 한라산이 떠 있었다, 와~ 정말 한라산이니? 감탄을 연발하는 내 모습에 친구는 애정이 담뿍 깃든 미소를 보여주었다. 타향살이에 지친 나에게 제주의 새로운 모습을 선사하고 싶은 친구의 마음이 진하게 느껴졌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메밀꽃 몇 송이 두런거리는 시야 너머 물결치는 것은 단애(斷崖)끝에 걸터앉은 마음이었다. 친구와 나는 순한 짐승처럼 그저 바다만 바라보았다. 푸르게 물결치는 바다가 막 40대를 건너온 삶의 파동 같았다.

송악산

송악산은 제주말로 ‘절울이’ 라고 부른다. ‘물결(절)이 운다’는 뜻이라 한다. 바다 물결이 산허리 절벽에 부딪쳐 우레 같이 운다는 데서 유래했다는데 막 중년에 들어섰던 우리도 그때, 삶의 절벽에 부딪히는 물결을 공감했던 것 같다. 서로의 마음을 살피던 그 때, 갈고리처럼 굽어드는 해안이 풍경을 끌어왔다. 난파당한 마음을 위로하듯 그림처럼 떠 있던 형제섬이 뒤 따라 왔기 때문일까, 눈앞에 출렁이는 사계 바다가 아침저녁 차려야 했던 식탁과 다름없는 것 같았다. 출렁거리는 식탁처럼 신산한 삶 앞에서 친구와 나는 다정한 형제처럼 서로에게 위무와 위로를 던졌다.

여긴 너무 고요한 식탁이야 고요가 들끓어서 목젖까지 아픈 식탁이야 전골냄비처럼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수평선에 입술을 덴 하늘도 푸른 식탁이어서 냄비뚜껑의 꼭지처럼  덜컹거리는 여긴 정말, 숟가락 없이도 배부른 식탁인거야

 저기 봐, 수평선 넘어 부푼 구름이 빗방울로 밥물 앉히는 중야 들어 봐, 밥물 잦아지듯 뜨겁게 끓는 파도 소리, 한 냄비 부글부글 끓는 수평선으로 살림 차린 나와 당신도 어쩌면 식탁일지 몰라 아니, 서로의 등뼈에서 슬픔을 발라먹던 식탁인거야 생선가시에 걸린 것처럼 내 목울대가 자주 흑흑거리는 건 당신보다 내가 더 식탁이었다는 증거야

오늘은 사계바다처럼 낯선 식탁이 되어 보는 거야 차량이 드문드문 외로움을 내려놓는 해안도로, 갓길에 앉아 잠자리와 메밀꽃, 노랑나비 한 쌍과 마주앉아 식탁 차리는 거야 식탁보처럼 바다를 탁 덮어 보는 거야 푸른 고래 등 같은 수평선을 한 입에 털어 푸른 것은 푸르게 삼키고 쓸쓸한 것은 쓸쓸하게 건너보는 거야

- 졸시 <푸른 식탁> 전문

지금은 산방산을 필두로 송악산에 이르는 길까지 관광객이 들끓지만 그때만 해도 제주의 어느 포구와 다름없는 사계포구만 있을 뿐 호젓하고 소박한 길이었다. 입에서 입으로 소문난 절경을 찾아온 차량들만이 드문드문 갓길에 서 있었을 뿐, 지금처럼 번잡한 길이 아니어서 그 길을 걸어 송악산으로 향했다. 친구는 그렇게 관광지로 개발되기 이전의 풍경들을 나에게 선사했다. “발을 잊는 것은 신발이 꼭 맞기 때문이고, 허리를 잊는 것은 허리띠가 꼭 맞기 때문이고, 마음이 시비를 잊는 것은 마음이 꼭 맞기 때문이다.” 장자 '달생편(達生編)'에 나오는 말처럼, 제주에 내려올 때마다 새로운 풍경 속에 나를 들여놓았던 친구와 나는 어느새 서로에게 꼭 맞는 신발이 되어 있었다.

암투병중인 친구를 오래 만에 조우했다. 각자의 등에 지고 온 슬픔을 감사하게 내려놓으며 변함없이 또 지고 가자고 약속했다. 푸른 것은 푸르게 삼키고 쓸쓸한 것은 쓸쓸하게 건너자고, 오래 전에 맹세했던 풍경을 마음속에 들여놓았다.

서귀포신문  sgp199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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