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는 것은 사람만이 아니었다. 마을에서 외양간에 매인 채 불에 타죽는 소 울음소리와 말 울음소리도 처절하게 들려왔다. 중낮부터 시작된 이런 아수라장은 저물녘까지 지긋지긋하게 계속되었다.”


 현기영은 소설「순이삼촌」에서 그날의 참상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었다. 그날은 4.3사건이 일어나던 1949년 1월 17일, 북촌초등학교에서 벌어진 풍경이다. 그 역사의 현장이었던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에 희생자 유족들과 마을주민들은 길을 뚫었다. 끊긴 길을 잇고, 따로 놀던 길을 모아놓았다. 그리고 ‘북촌마을 4.3길’이라는 이름을 붙여 지난 12월 10일, 개통식을 가졌다. 그 길을 따라 걷는다.

△ 지난 12월 20일, 북촌마을 4.3길 개통식 모습(사진 : 김기삼)

출발하기에 앞서 일단 너븐숭이 4.3기념관을 둘러보면 북촌마을이 겪었던 4.3당시의 실상을 잘 느껴볼 수 있다. 역사적 현황에서부터 희생규모까지 4.3피해의 상징적 공간이다. 밖으로 나서면 속칭 ‘너븐숭이’ 너럭바위가 펼쳐져 있고, 제대로 감장하지 못한 애기무덤들을 만나볼 수 있다.


“누가 이 주검을 위해/한 줌 흙조차 허락하지 않았을까/누가 이 아기의 무덤에/흙 한 줌 뿌릴 시간마저 뺏아 갔을까”라고 돌비에 새겨진 양영길 시인의 시를 만날 수 있다.


 저 멀리 바다를 향해 서 있는 위령비도 만나볼 수 있다. 이 위령비에는 4백여 희생자의 명단이 새겨져 있다. 제발 그냥 훑어지나가지 말기를. 그리고 현기영 소설가가 쓴 비문도 찬찬히 읽어볼 일이다. “무자년의 그 참사를 용서하지만 잊지 않기 위하여 세계의 사람들이 진정한 평화가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도록 전쟁반대의 이름으로 영구불망의 돌을 세운다. 새로운 빛으로 거룩하게 되살아나시어 우리 마을과 우리 겨레의 앞길을 환하게 비추어 주옵소서”


제주의 곳곳에 세워진 4.3위령비문을 보면 ‘고이 잠드소서’ 풍의 비문이 많은 반면 ‘새로운 빛으로 거룩하게 되살아나기’를 바라는 비문 앞에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여기서 발걸음을 돌리면 안 된다.

순이삼촌 문학비가 서 있고 주검처럼 돌비가 널브러진 옴팡밭을 찾아 4.3의 진실을 발설하다가 수난을 당했던 문학과 만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시간이 되거든 너럭바위에 심어진 동백나무와 그 밑에 “온 나라 흙과 물 한데 모아 평화기원 나무 심다”라는 글이 새겨진 표석을 찾아보라. 그 동백나무는 마찬가지로 주민 50% 이상이 희생당한 서귀포시 영남마을에서 옮겨 온 의미도 있거니와 우리나라 현대사의 아픔을 간직한 지역의 흙과 물을 가져다 심은 나무이기 때문이다.


 너븐숭이 일대를 둘러봤으니 함덕 서우봉으로 가자. 해동마을의 아기자기한 돌담길을 지나 서우봉으로 가는 이유는 속칭 ‘몬주기알’을 살펴보기 위함이다. 4.3길 코스로 집어넣고 있긴 하지만 절벽이 가팔라 잘 정비하지 않으면 안내자 없이는 접근이 어려운 지역이다. 하지만 증언이나 기록 등을 통해 잠시 생각에 잠겨 보아도 좋다.

4.3당시 함덕해수욕장 인근에 주둔하던 군인들의 대대본부에 중산간 주민들을 수용하였다가 이곳 절벽으로 끌어와 학살시켰다. 당연히 시신은 절벽 밑으로 떨어져 유족들이 수습하는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더욱이 20대 꽃다운 처녀들을 이곳에서 학살시킨 사례는 몸서리를 치게 한다.


 돌아오다가 봉우리 중턱에서 바닷가를 향해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일제진지동굴을 살펴보고 허물어져 원형이 많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환해장성을 만나고, 마을주민의 안녕과 평안을 관장하던 현장인 가릿당(구짓머루당)을 만나는 것도 북촌 4.3길의 보너스다.


 그렇게 걷다보면 북촌포구에 이른다. 손에 잡힐 듯 다려도가 내다보이는 이곳 포구가 북촌마을 사람들의 삶이 응축된 현장이다. 4.3과 연결시켜본다면 허투루 보아 넘겨선 안 된다. 1947년 8월의 경찰관에 대한 폭행사건과 1948년 6월 우도지서장 살해와 납치사건을 고스란히 지켜봤을 등명대가 있는 곳이다.

1915년에 건립되었으니 100년을 넘긴 등명대(도대불)도 눈여겨 봐둘 일이다. 바닷길을 밝혀주던 이 등명대의 표석에도 4.3당시 상흔을 남겼으니 무모한 총질이 사람에게만 미친 것이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해변을 접하여 걷다가 마을 동쪽 끄트머리에서 일주도로로 나와 동복지경의 속칭 ‘낸시빌레’로 간다. 북촌주민 20여 명이 대학살이 이뤄지기 전인 1948년 12월에 끌려와 학살당했던 곳이지만 역사현장은 잘 알려지지도 않았고, 제대로 정비가 이뤄지지 못했다. 그런 현장은 또 있다. 다시 북촌마을로 되돌아오는 길에 만나는 속칭 ‘꿩동산’.

△북촌마을 4.3길을 걷고 있는 참가자들(사진 : 김기삼)

너븐숭이는 잘 알고 있어도 이곳 꿩동산은 지금도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다. 북촌대학살 직후인 1949년 2월, 구좌읍 월정리의 구좌중앙국민학교에서 함덕대대본부로 무기를 이송하는 과정에서 이곳 고갯마루에 이르렀을 때 매복해 있던 무장대들에 의해 트럭이 습격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무기를 탈취당하고 군인 등 20명에 가까운 인명이 희생된 현장이다. 덤불과 소나무 등으로 우거졌던 이곳이 일주도로 확장되고 이후 소공원 조성사업으로 정비되긴 했으나 4.3의 현장이라는 사실은 지나치기 쉽다. 예전에는 희생된 군인들의 비석이 있었다고 하나 찾아보기 어렵다. 너븐숭이와 대비하여 보면 북촌의 동쪽과 서쪽에 위치해 있으면서 이념의 대립이 극심했음을 느껴볼 수 있다.


 한숨 돌리고 선사시대 유적인 고두기엉덕으로 간다. 지방기념물로 지정되기도 한 이곳을 지나면서 생각한다. 오래 전부터 삶의 터전이었건만 4.3이라는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무남촌(無男村)으로 변해버렸던 비극의 땅 북촌마을. 포제단도 마찬가지다. 마을의 무사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던 그 터 역시 총칼 앞에 자지러지던 역사의 피울음을 듣는다.


 다시 마을 안으로 들어선다. 북촌포구사건으로 마을을 들쑤실 때 마을청년들이 숨어 있다가 발각되어 육지형무소로 이송되었다는 마당궤. 그곳을 지나 북촌대학살 당일에 100여명의 주민을 ‘저물녘까지 지긋지긋하게’ 총살하는 현장을 지켜봤을 당팟의 팽나무가 바닷바람에 녹슬고 있었다.


 정지폭낭 비석거리를 거쳐 북촌초등학교로 간다. 마을사람들을 전부 모이게 하고 대학살의 전주곡을 올렸던 학교마당이다. 걸궁을 통하여 희생자들을 위무하는 것도 죄가 되었던 ‘아이고 사건’의 현장이다. 그곳엔 흙 한줌, 풀 한포기가 역사의 질곡을 뚫고 거뜬히 살아낸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처음 출발했던 너븐숭이 기념관에 다시 돌아왔다. 7킬로미터의 거리를 걸어 온 셈이다.

객원기자 강덕환 시인

두 시간 정도의 거리지만 자세히 보고 오래 본다면 하루 종일 시간이 소요될 지도 모른다. 세찬 바닷바람으로 제대로 걷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단순한 관광객이 아니라, 순례자처럼 찬찬히 걸어볼 일이다. 북촌마을의 4.3사건의 와중에 단일 사건으로는 최대의 피해마을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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