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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사 항일운동의 역사적 의의 바로 세워야기획-제주 법정사 항일운동 100주년 4
서귀포신문 | 승인 2017.08.21 09:34

기미년(1919) 3·1운동보다 약 5개월 먼저 제주 서귀포 법정사에서는 스님과 지역주민이 중심이 된 항일운동이 있었다. 이름하여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 내년 2018년이면 100주년을 맞는다. 서귀포신문은 제주법정사 항일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정명(正名)과 함께 그 역사적 의의를 조명하고자 한다. 글 싣는 순서는 다음과 같다.

1.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의 개요
2.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의 목적
3.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 참여 마을과 주민

4.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의 왜곡

4.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의 왜곡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은 국권회복이라는 목적을 분명히 선언한 항일운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혹세무민의 난리 정도로 왜곡했다.

법정사 항일운동 관련 일제의 자료를 연대순으로 비교 검토하면 법정사 항일운동에 대한 일제의 왜곡이 의도적임을 느낄 수 있다. 이는 물론 항일운동의 기세를 꺾어야만 하는 일제의 정책에 의한 것임은 자명한 일이라 할 것이다.

일제는 법정사 항일운동 참여자의 숫자를 점차 축소 왜곡해 나간다. 1918년 10월에 일어난 법정사 항일운동은 1920년 4월 12일 󰡔매일신보󰡕에 처음 기사화된다. 이 첫 기사는 제주에서 김연일이 ‘700명’을 거느리고 소요를 일으켰다고 보도하고 있다. 그러다 1923년 󰡔매일신보󰡕 2월 20일자는 강창규 체포 소식을 기사화하면서 참여자들을 ‘400명’의 대폭동단이라고 표현했다.

다음으로 1923년 6월 29일 자료인 󰡔정구용 판결문󰡕에서는 ‘300~400명’이 참여했다고 바뀌었고 1934년 󰡔폭도사 편집자료 고등경찰요사󰡕에는 ‘약 400명’으로 표현했다. 법정사 항일운동 실행 20년 뒤인 1938년 8월 13일자 󰡔매일신보󰡕에 와서는 ‘약 300명’으로 축소 왜곡되었다.

이렇게 법정사 항일운동에 참여한 주민들의 숫자는 맨 처음 기록 700명이 400명으로, 300~400명으로, 약 400명에서 다시 약 300명으로 점차 축소해 기록하고 있음을 찾을 수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참여자의 숫자가 점점 축소되어 가는 것은 일제의 의도 말고는 달리 그 이유를 찾기 어렵다.

법정사 항일운동의 거사 목적에 대한 기록도 마찬가지이다. 1920년 󰡔매일신보󰡕에는 “불무황제 김연일이 부하 700명을 거느리고 소요하였다.”라고만 표현하고 구체적인 언급은 삼갔다. 1923년 󰡔매일신보󰡕에는 “승려 여러 명과 부근의 주민 수십 명이 단결한 후에 일본인 관리를 체포한 후 독립을 계획하였다.”라고 보도했다. 그리고 1923년 ‘정구용 판결문’에서는 “제국정부의 조선통치에 대해 불평을 품어온 법정사 주지 김연일이 불교도 및 농민을 모아 도당을 만들고 도내에 거주하는 일본인 관리를 도외로 쫓아냄으로써 제국정부의 통치에 반대하는 기세를 보여주고자 법정사에 모여든 신도들에게 가담을 강요하였다.”라고 기술했다.

1934년 ‘폭도사 편집자료 고등경찰요사’는 “언제나 교도에 대하여 반일사상을 고취시켰으며 국권회복을 위해 일본인을 쫓아내야 한다. 그리고 선도교에 대한 경찰의 단속이 엄중해서 일을 꾸몄다.”고 표현했다. 이렇게 국권회복을 위한 거사였음을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20년이 지난 1938년 󰡔매일신보󰡕에 가서는 법정사 항일운동의 내용이 완전히 다르게 표현될 뿐 아니라 장소도 산방산으로 바뀌기까지 한다. “제주도는 원래 미신사파가 많은 곳인데, 1918년에 김연일이 사교도를 규합하여 제주도 대정면 산방산에서 불무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고 300명의 민중을 선동하였다.”고 보도했다.

이렇게 일제는 법정사 항일운동이 일어났던 시기로부터 멀어질수록 점차 독립운동의 의미를 희석시키려 하는 의도를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제의 이러한 축소 왜곡의 의도는 비단 신문 보도와 기록의 행태에서만이 아니라 사건을 접수하고 처리하는 과정에서도 물론 드러났다. 제주도에 설치되어 있었던 제주지청 검사분국에서 사건을 처리하지 않고 참여자들을 목포지청으로 이송해 조사했다는 점 등을 통해서도 일제가 법정사 항일운동의 의미를 왜곡하고 확산을 금지하려 했던 의도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일제의 왜곡 의도는 보천교의 난이라는 인식으로 오랫동안 항일운동으로 조명 받지 못하고 잊혀지게 하는 한 원인이 되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야 향토사학가 김봉옥 선생님의 자료 발굴 등으로 항일운동으로 조명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지금도 제주도민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제주도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제주도 최대 규모의 항일운동 법정사 항일운동의 현재 인식 정도가 안타깝다. 이는 일제가 축소 왜곡하고자 노력했던 그 의도의 연장선에 있다. 이제 법정사 항일운동 100년을 앞두고 우리가 다시 재조명해야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금순 / 문학박사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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