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길 /서귀포문화원 문화대학장·제주언론인클럽 상임부회장

지난 15일은 제72주년 광복절이었다. 이 날을 흔히 ‘해방된 날’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으나, 이는 그리 좋은 용어가 아니다. 해방(解放)은 글자그대로 남의 속박으로부터 풀려남을 의미한다. 그것도 스스로가 아닌, 타력(他力)으로 이루어졌다는 뜻이다. 사실 우리나라의 독립이 우리들의 힘으로 쟁취된 것은 아니다. 미국을 위시한 구(舊) 소련과 영국, 프랑스 등 연합국에 의해 얻어진 것은 맞다.

하지만 해방이라는 말을 쓰면,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느낌이 들어 어딘지 모르게 국민적 자존심이 상하는 듯싶다. 수치감이 드는 것이다. 더구나 해방이라는 단어는 북쪽에서 즐겨 사용하는 것이어서 기분이 언짢아 지기도 한다. 이를테면 ‘남조선 해방’, ‘노동자 해방’ 등이 그것이다. 그런 점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국경일을 제정할 때, 8.15를 ‘광복절’로 명명(命名)한 것은 대단히 의의 있는 일이라 하겠다. 우리 역사교과에서 ‘해방’이라는 말 대신에 ‘광복’이라는 술어가 완전히 정착된 것은 1982년부터이다. 고등학교 국사교과서에서 ‘민족의 해방’이라는 제목을 ‘민족의 광복’으로 바꾸어 출판하기 시작한 것이다.

광복(光復)이란 ‘빛을 되찾았다’는 의미로, 잃었던 주권을 회복했다는 매우 뜻 깊은 용어이다. 이러한 광복은 그러나, 우리에게 독립과 환희와 희망만을 안겨준 것은 아니다. 단일민족, 하나의 국가가 남북으로 분단되었고, 여기에 6·25라는 민족상잔의 처절한 전쟁이 뒤를 이었다. 휴전이 된지 64년이 지나고 있으나, 아직도 전쟁이나 다름없는 준전시(準戰時)상태이다.

이제 그토록 참혹한 전쟁을 다시 겪을 수는 없다. 더욱이 같은 형제, 한 동포끼리의 싸움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다. 통일만이 사는 길이다. 그렇다면 통일은 어떻게 성취해야 할 것인가. 1950년대 자유당 정권시절, 우리는 ‘북진통일’, ‘멸공통일’을 외쳤다. 북진(北進)을 하고, 멸공(滅共)을 하려면,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 다시 전쟁을 해서라도 통일을 이룩해야 한다는 ‘다짐’이 당시의 정책이었다.

1960년 4.19 이후, 이런 주장은 점차 수그러들면서 ‘평화통일’이 주를 이루게 되었다. 원래 우리는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 아니던가. 북한이 무도한 불법남침을 하지 않았더라도, 그리고 피아간(彼我間)의 처참한 살상이 없었더라도, 평화를 아끼고 존중하는 우리는 벌써 ‘통일 대한민국’에서 ‘그야말로’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평화는 현실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남과 북 사이의 상황을 면밀히 분석하고 대처하면서 평화를 바라고 주장해야 한다. 핵무기로 협박을 일삼고 있는 김정은 집단은, 대화를 통해 평화적 해결을 모색하려는 우리의 제안을 계속 외면하고 있다. 우리가 아무리 평화적 통일을 염원한다고 하더라도 걸핏하면 ‘서울 불바다’를 떠들어대는 저들을 보면, 당장은 헛수고가 아닐까 우려된다.

평화란 전쟁이 없는 평온한 세상을 말한다. 어느 한쪽만의 노력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특히 일방(一方)이 강하면 약한 쪽은 당(當)하게 마련이다. 평화에는 반드시 균형(均衡)이 뒤따라야 한다. 이른바 ‘힘의 균형’이다.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 그래야 ‘평화’를 지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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