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희의 예술가의 집 18> 김남흥의 북촌리 작업실

▲ 돌하르방 공원의 신록과 어우러진 작업실 외관
갤러리와 미로로 통하는 작업실서 다시 붓을 들다

4월답지 않은 맵싸한 날씨 속에 찾은 북촌 돌하르방공원. 오천 평(16,500㎡)에 이르는 널따란 대지 위에 저마다 한 자리씩 차지하고 선 돌하르방들 사이로 난 오붓한 길을 따라 걷는다. 참으로 오랜만에 밟아보는 흙길이다.

여기저기 돌 틈 사이로 피어있는 들꽃의 얼굴은 수줍기만 하고 격렬한 바람에 부대끼며 나무들이 내는 소리는 오히려 흥겨운 듯 하다. 이토록 싱싱하고 이토록 짙푸른 자연 속에 작업실을 가진 예술가는 얼마나 행복할까.

▲ 작업실 한켠에 마련된 작품 보관실
이윽고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진 시각, 붉은 노을 뒤로 천천히 찾아드는 어둠은 어떤 빛깔일까. 밤샌 창작으로 신열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녘 이 숲을 밝히는 여명 아래 선 그 기분은 어떠할까. 이는 오로지 이곳에서 7년째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돌하르방공원 원장이자 서양화가인 김남흥 화백만이 알 일이다.

안내를 받아 들어선 작업실. 청동으로 마감한 외부의 현대적 이미지와는 달리 회벽 사이로 서까래가 드러난 토속적인 공간이다. 천장이 높고 시원하게 뚫려선지 창으로 들어오는 오후의 기운 햇살이 아직 밝기만 하다. 돌하르방 공원을 조성하던 때부터 살림집으로 썼던 공간을 지난해부터 작업실로 쓰고 있다는 설명이다.

한 사람 겨우 오르내릴 수 있는 나무 계단을 본 순간 호기심이 발동한다. 한 잔 술을 걸친 상태로는 제대로 오르기 어림없는 계단이다. 예닐곱 계단을 밟고 올라서니 자그마한 공간이 나오고 거기를 통과하면 작업실 아래층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쪽마루가 나온다.

쪽마루에 난 두 개의 창밖으론 연초록의 새 잎이 돋아나는 공원의 전경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뒤돌아서니 나타나는 또 하나의 문, 널따란 방이다. 그 방의 끝엔 또 문이 있다. 그 문을 나서면 무엇이 있을까? 작업실에 잇대어진 수장고로 통하는 문이란다. 겉에서 보면 작업실과 갤러리가 하나의 건물처럼 보인 까닭을 이제야 알겠다. 굳이 바깥을 통하지 않고도 작업실과 갤러리를 드나들 수 있는 미로가 이 2층에 숨겨져 있는 셈이다.

▲ 2층 쪽마루에서 내려다본 작업실 전경
작업실 한편엔 지금껏 그려온 캔버스들이 차곡차곡 쌓여있고 이젤 위엔 그리다 만 제주 풍경이 한 점 숨고르기를 하고 있다. 바닥엔 낯익은 제주의 오름이 평화롭게 누워있다.지난 해 <거치른 고요, 제주-김남흥 그리고 박훈일 찍다>라는 이름으로 사진작가 박훈일씨(김영갑 두모악갤러리 관장)와 서울에서 가졌던 2인전에 선보였던 그림이다.

1999년 두 번째 개인전 <思色> 이후 10년만의 외출이었다. 그 10년 동안 김화백은 '부재'중이었다. 이젤 앞에 섰던 날보다 망치를 들고 돌을 깨는 날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드러난 아름다움 좇다 발견한 제주 문화의 '속살'

   
 
▲ 작품 '세상에서 가장 큰 돌하르방'의 품에 안긴 감화백
 
"99년도에 개인전을 끝내고 안 가본 데가 없을 정도로 제주 풍경을 쫓아다녔는데 눈에 보이는 '경관' 뒤에 '진짜'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오름 능선 아래 무덤군이 새롭게 보이고 궁금해지고 초가의 멋들어진 곡선 뒤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지고...그때까지 드러난 아름다움만을 찾아다녔다면 그제야 비로소 드러난 아름다움에 담겨진 내면이 보이기 시작한 거지요. 그 울림과 교류하고 싶었어요."

제주 '원주민'이었음에도 제주에 대해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다. 도서관을 찾아다니며 향토자료를 뒤지고 인문분야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지역문화에 대해서도 새롭게 눈을 뜨게 되었다.

그러나 고민은 있었다. 전업화가가 걸어야 할 길은 첩첩산중, 그동안 가족이 짊어져야 할 짐이 너무 버거워보였다. 그림을 팔지 않아도 된다면, 평생 좋아하는 일만 하고 살 수 있다면 하는 생각이 굴뚝같았다.

▲ 공연공간으로 쓸 수 있도록 설계된 작업실과 갤러리의 앞마당에서의 김남흥 화백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문화센터였다. 제주의 이 풍요로운 자연을 바탕으로 양질의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차별화된 문화센터 건립을 일차 목표로 삼았다. 조금씩 작업을 하다보니 사회적으로 미술이 차지하는 비중을 보거나 문화현실을 보거나 현실성이 부족하다는 결론뿐이었다. 뭔가 대중적인 콘텐츠가 필요했다.

돌하르방공원은 그렇게 해서 태어났다. 그러나 애초보다 '판이 너무 커져버려' 자본부족에 시달리다보니 개원한 지 3년이 지났건만 공정율은 65%에 머물러있는 상태라는 자평이다.

"지난 7년 동안 이 부지를 사고 공원을 조성하면서 쓴 기록과 일지, 금전출납부 등을 다시 정리하면서 다시는 도저히 못할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살아남기 위해 더욱 집중할 수밖에 없었고 이제는 멈출 수도 없습니다. 공정율 80% 정도만 돼도 콘텐츠에 자신 있습니다만...시간이 더 흘러야 하고...더 집중해서 작업해야 하고...어차피 살아간다는 것은 과정의 질을 담보할 때만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거라고 생각하니까요."

애초에 계획했던 문화센터의 첫걸음도 떼기 시작했다. 올 3월부터 주1회 문화유산해설사들을 대상으로 그림지도를 시작했고 5월에는 어린이 미술교실을 열 예정이다. 형편이 되는 대로 저녁에는 직장인을 대상으로 미술강좌도 열고 야외스케치반도 꾸리다보면 여름까지는 충분한 워밍업의 시간이 될 것이고 9월부터는 일반인 공개강좌를 시작할 수 있으리라는 계획이다.

소통하는 미술공간 꿈꿔...'기름기' 뺀 그림세계 추구

제주문화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돌하르방 재현과 함께 돌하르방의 새로운 재해석·창작 과정을 해나가는 이 공원에서 지역민이나 관광객이 항시적으로 미술을 접하는 것, 이것이 김화백이 꿈꾸는 건강한 돌하르방 공원의 모습이다.    

"제가 계속 그림만 그렸다면 아마도 탐미적 시각에만 머물러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그에 그치지 않고 소통하고 교류할 수 있는 문화의 영역으로 외연을 확장할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소중한 경험입니다. 이 일을 문화센터라는 공간에서 이뤄보고 싶습니다."

오랜 '부재'에서 돌아와 이제 다시 이젤 앞에 선 김화백. 지난해 전시 준비를 하면서 '손이 풀리기 시작했다'는 말로 다시 그림 작업을 시작했음을 암시한다. 단순히 아름다운 풍경이 아니라 제주의 속살 가운데 들여다봐야 할 가치가 충분한 소중한 '제주적' 소재들에 마음이 가 닿는다고도 고백한다.

 
그동안은 공부를 하는 기간이었다면 이제는 나만의 그림세계를 만들어야 하는 시기가 아닌가 싶다고도 한다. 그래서 김화백은 일차적으로 '색을 빼고 싶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수많은 색채를 거치고 건너 황금빛에 이른 노화가 변시지화백처럼, 기름기를 빼고 색깔을 빼고 싶은 게 소망이란다. 

김화백의 작업실을 나서는 길, 그의 손에서 태어난 돌하르방들을 가리키며 우문(愚問)을 던진다. "그림을 그리는 일과 돌하르방을 만드는 일은 사뭇 다를 텐데 어떻게 그동안 이 일에만 몰두할 수 있었나요?"

돌아오는 현답(賢答).
"결국은 두 가지 다 대상을 가만히 잘 들여다보는 일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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