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계담 시민기자의 돌아본 사회교육 50년 <6>

제주상고 야간반으로 전학하자마자 산지에 있는 어느 술 도매상에 취직했다. 전학비용은 고향집에서 마련해줬지만 그다음부터 드는 학비와 생활비는 스스로 벌어야했기 때문이다.

아침 여섯 시에 출근해 청소하고, 거래상인 소매점들에 배달하러 다녔다. 장부정리며 잔심부름도 내 몫이었다. 그렇게 열 시간 넘게 일하다가 오후 다섯 시에 등교해 공부하고 밤 열 시 넘어 귀가하노라면 온몸이 물먹은 솜이 되기 일쑤였다. 그러나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생각하면 조금도 힘들지 않았다. 

▲ 제주상고 3학년 C반 담임 신백균 선생님을 모시고 기념촬영. 앞줄 두번째가 필자(김계담 오른쪽)

그때의 제주상고는, 내가 9회 졸업생이니 역사는 짧았지만 재학생들의 포부가 대단했었다. 많은 선배들이 당시 최고의 선망이었던 한전이나 은행 등의 좁은 취직 문을 통과해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재학생들에게 자부심과 용기를 한껏 심어주었던 것이다. 주산자격증을 따기 어려운 때여서 주산만 잘하면 얼마든지 조건 좋은 직장에 취직할 수 있던 시절이기도 했다.

나 역시 다른 친구들처럼 은행원이 되기를 꿈꾸며 열심히 공부하고 주산연습에 매달렸다. 그러나 교내며 도내 주산기능대회에서 그리 좋은 순위를 차지해보지는 못했다. 주산연습은 나만 열심히 하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더구나 낮에는 일해야 하는 야간학생이었기 때문에 주간학생들을 따라잡기가 힘들었던 게 사실이다.
학교수업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여기고 주산을 더 배울 욕심으로 제주시 동문로 언덕에 있는 '제주주산학원'을 찾아갔다. 그곳은 나에게 제주상고로 전학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준 서귀분원의 본원으로, 당시 원장은 송대은 씨였다. 그 뒤 내 생활반경은 직장, 학교, 학원을 벗어나보지 못했다. 아니, 틈만 나면 학원에서 살다시피 했다.

당시는 막 주산 붐이 일어날 때여서 학원은 늘 학생들로 붐볐는데, 특히 초등학생들이 많았다. 나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학원청소며 정리도 하고, 초등학생들을 가르쳐주기도 하면서 학원 문을 닫을 때까지 열심히 주산연습을 했다. 그런 내가 기특했는지 원장은 고맙게도 나중에는 수강료도 받지 않았다.

▲ 제주상고 제9회 졸업기념(1963.2.11) 앞줄 중간에 앉은 분이 허두구 교장선생님이며, 왼쪽으로부터 4번째줄 12번째가 필자(김계담).

주산 3급 검정자격증을 따고 제주상고를 졸업하던 날, 다른 친구들처럼 꽃다발을 들고 와서 축하해주는 사람 하나 없었지만 조금도 서럽거나 섭섭하지 않았다. 내 손에는 그 어떤 훈장보다 빛나는 자격증과 졸업장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보고 기뻐할 어머니와 동생을 떠올리니 코끝이 찡해지고, 마음이 급해졌다.

고향집으로 향하는 발길이 그때처럼도 가벼우랴. 졸업장을 소중히 안은 가슴은 자부심과 뿌듯함으로 터질 듯했다. 난생 처음 의기양양하게 고향길을 걸었다. 앞으로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지겹게 따라다니던 가난의 굴레를 금방이라도 벗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졸업장을 어머니와 동생에게 바치고 얼마동안 붕 떠서 살았다. 계획은 이미 세워져 있었다. 계획대로라면 이제 취직시험만 남았고, 난 충분히 좋은 직장에 합격하리라 믿었다.

번듯한 직장인으로서 어머니와 동생에게 자랑스러운 가장이 되는 상상을 즐기기에 여념이 없던 어느 날, 전보가 한 장 날아왔다. 제주주산학원의 송대은 원장이 보낸 것이었는데, 서귀분원에 주산강사가 필요하니 원한다면 나오라는 내용이었다.

지난 날 가슴 깊은 곳에 품었던 선생님에 대한 동경이 고개를 들었다. 내가, 그저 막연한 꿈이라 여겼었던 그 선생님이 될 수 있다니! 더구나 주산강사라면 내가 가장 좋아하고 자신 있는 주산을 가르치는 일이 아닌가.

그동안 세웠던 계획은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바로 서귀포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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