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계담 시민기자의 돌아본 사회교육 50년 <9>

나는 스물 네 살 되던 해인 1967년, 주산 2단 자격시험에 합격했다. 1985년에는 주산 교육 10단이 되었다. 당시 주산 10단은 서귀포는 물론 제주도 전체에서도 드문 사례였기 때문에, ‘주산 하면 김계담, 김계담 하면 주산’이라는 소리를 심심찮게 들었다. 그리고 그 말을 듣는데 어색해하지 않을 만큼 나는 주산에 자신이 있었고, 주산에 몰입하는 시간을 행복해 했다.

주산보다 더 행복한 것은 그것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1964년부터 무료봉사로 시작된 서귀여자중고등학교에서의 주산 무료교육은 군에서 제대한 뒤로도 계속 이어졌다. 이 학교에서의 주산교육은 중고등학교 전체 학년을 대상으로 한 학급 당 일주일에 한 시간씩 특별활동 수업으로 이루어졌다.

▲ 서귀여자중학교 학생들에게 주산 봉사 강의(호산)하는 필자(김계담)

학생들 입장에서는 일주일에 한 시간이었지만, 내 입장에서는 날마다 서너 시간이었다. 1976년까지 여중에서 8년, 여고에서 5년 등 13년 동안 주산을 가르친 학생 수를 계산해보니 중학생 3,700여명, 고등학생 1,300여명 등 모두 5,000여명이었다. 그 가운데 1,600여 명이 주산검정시험에 합격하고, 100여 명이 주산 덕분에 취업하는 등, 내게 가르친 보람과 기쁨을 몇 배로 안겨주기도 했다.

고산상업고등학교도 특별히 기억되는 학교다. 내가 자진해서 찾아간 게 아니라 나를 초청해준 학교이기 때문이다. 고산상업고등학교는 1969년 3월에 개교를 한 곳이다. 그 학교 교사들이 학원으로 나를 찾아온 것은 그해 2월의 어느 날이었다. 상고이기 때문에 주산이 필수과목인데, 주산교사가 귀한 시절이어서 교사를 미처 구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내 주산실력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며 주산교육을 맡아달라고 했다. 특별활동수업이 아니라 정규수업이었고, 무료봉사가 아니라 정식 보수가 지급되는 강사 자리였다.

그때만 해도 고산은 너무 멀어서 출퇴근할 수 있는 거리가 아니기도 했지만, 이미 다른 학교에 봉사강의를 나가고 있는 때여서 시간을 내기가 어려웠다. 무료봉사해야할 자리였으면 거절하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보수가 지급된다기에 다른 교사를 구할 수 있을 거라며 정중하게 거절했다.

며칠 뒤에 또 찾아와서 아무래도 꼭 맡아줘야겠다고 거듭 부탁하는데 또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해서 고산상업고등학교의 개교와 함께 초청강사 생활이 시작되었다. 수업이 있는 날은 전 날 저녁에 고산에 가서 1박을 해가며 1년 동안 50여 명의 학생들에게 주산과 부기를 가르쳤다. 고산상고에 이어 남주고등학교 야간반 주산강사로 2년 동안 40여 명의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이 두 학교를 제외하고는 내가 보수를 받고 주산을 가르친 학교는 없다.

 

▲ 당시 서귀국민학교에서 여름방학 중 주산봉사 강의를 마치고 기념촬영

 

1969년은 내 인생에 매우, 아니 가장 중요한 해이기도 했다. 내 인생의 반려자를 만난 해이기 때문이다. 그해 1월 말경, 우연히 학원 앞에서 서귀여고에 처음 봉사강의를 나갔을 때 주산을 가르쳤던 제자들을 만났다. 그 중에 한 제자가 며칠 뒤 자신의 언니를 소개시켜주었다. 내 아내를 그렇게 만났다. 나도 아내도 수줍음이 많은 성격이어서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못해봤다. 그러나 운명이어서인지 당사자들보다 오히려 서로의 집안에서 혼사를 서둘러, 만난 지 한 달 만에 결혼을 했다. 결국 아내와의 인연도 주산이 맺어준 셈이니, 이래저래 주산은 내 인생의 모든 부분을 연결하는 다리가 아닐 수 없다.

1971년부터는 여름 및 겨울방학 기간을 이용해 해마다 3~4개 학교 및 단체를 순회하면서 주산 무료강의를 했다. 1985년까지 9년 동안 서귀포시내는 물론 보목, 위미 등 9개 초등학교, 남원 등 6개 중학교, 대정 등 4개 고등학교에서 주산을 가르쳤으니, 산남에 있는 학교는 대부분 돌아다닌 셈이다. 제남보육원 등 6개 단체도 무료강의를 하러 돌아다녔는데, 보육원 원아들에게 주산교재를 무료로 나누어줘 가며 가르쳤던 기억이 새롭다.

학교에서 주산 무료교육으로 시작된 봉사활동은 그 범위를 점점 넓혀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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