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계담 시민기자의 돌아본 사회교육 50년 <15>

▲ 2000학년도 서귀포문화학교 개교식 기념촬영(2000. 5. 26) (필자는 앞줄 중간에 않아 있음)

내 생애 가장 잊지 못할 날을 꼽으라면, 1994년 9월 17일이 떠오른다. 그 전날은 내 50번째 생일이었다. 세상에 태어나 딱 50년을 살아낸 9월 17일, 사회교육 30년을 정리해 엮은 책 ‘훈도(薰陶) 그 외길 30년’ 출판 기념회를 가진 것이다.

장소는 서귀포 프린스호텔, 당시 20여 명의 전․현직 기관장 및 단체장을 비롯해 130여 명의 인사들이 참석해 축하와 격려를 해주었다. 한국학원총연합회 제주도지회에서 행사를 마련해주었는데, 당시 강대원 지회장의 개회사 중 “김계담 원장의 무료봉사 강의를 본받아 전도 학원에서도 가정형편이 어려운 수강생에게 무료강의를 실시하고 있다”는 내용이 그 무엇보다 뿌듯하고 감사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주산 덕분이지만 나는 상당히 꼼꼼한 편이라, 생활하면서 나와 관계된 자료는 종잇조각 하나라도 소홀히 않고 잘 정리해 모아두고 있다. 그 습관 덕분에 쉰 살 되던 해에 그동안의 자전적 기록과 사회활동을 정리해 400여 쪽의 책으로 엮을 수 있었다.

쉰 살이면 하늘의 뜻을 아는 지천명(知天命)이라지만 그건 공자님에게나 해당되는 얘기이고, 평범한 사람으로서는 나이 50에 삶의 여정을 정리해 책을 출판한다는 건 사실 좀 이른 감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분들이 기꺼이 참석해 축하해주고, 그동안 수고 많았다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으니 얼마나 고맙고 송구스러운 일인지 모르겠다. 지금 생각해보면 더 송구스럽다. 요즘 50이면 한창 젊은 나이 아니던가?

▲ 서귀포문화원 민속보존예술단 창단 기념촬영(2000. 9. 27)(필자는 두 번째 줄 중간에 서있음)

어쨌거나 1994년의 출판기념회는 ‘나’를 위해 치러진 내 생애 유일한 행사였던 셈이다.

출판기념회의 감동도 잠깐, 나는 또 다시 뛰어다니며 바쁜 나날을 보내야 했다. ‘서귀포문화원 설립’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서귀포문화원 설립의 필요성이 대두된 것은 1990년대 초였지만, 앞장서서 일하겠다고 선뜻 나서는 인사가 없었다고 한다. 내게 그 일을 해주지 않겠느냐는 권유가 있었던 것은 1993년이었다. 문화원 설립의 필요성은 통감했지만 그 막중한 일을 앞장서 해나갈 자신이 없어 처음에는 사양했다. 그러나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기에 걸맞은 사람이라도 찾아보자 싶어 관련 자료를 검토하다가 밤낮없이 고민하며 동분서주하게 되고 만 것이다. 

문화원 설립 발기활동은 1994년 10월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발기대회를 열기 위해 추천된 114명의 인사를 일일이 찾아다니며 발기인 동의서명을 받아내고, 1995년 발기대회를 치르고, 그 뒤 법인설립 인가를 받기 위해 필요한 총 25종 365매의 서류를 꼼꼼히 준비하고 286명의 회원을 확보하는 등 설립인가를 받기까지 3년여가 걸렸다.

드디어 1996년 서귀포문화원이 문을 열었을 때의 감동을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개원한 뒤 초대 상임부원장 4년, 3~4대 원장 8년을 지냈다. 특히 원장 임기 8년 동안 1년에 평균 20여 개의 사업을 추진하고 집행했었다. 짧은 연륜의 문화원이지만 정부의 특별사업에 공모해 전국에서 유일하게 연달아 지정되어 큰 규모의 사업을 집행했던 일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서귀포문화원 설립 태동기인 1993년부터 4대 원장직을 퇴임한 2008년 3월까지 16년 동안 문화원 관련 17개 무보수 명예직을 함께 맡았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서귀포문화학교 교장이었다. 풍물반, 무용반, 민요반, 가요반, 향토역사반 등 5개 교실을 개설하고 1년에 6개월씩 총 2,677명을 교육시켜 11회 동안 1,404명이 수료하는 등 많은 문화예술인들을 배출시켰다. 그 가운데 우수 수료생 50여 명으로 구성된 예술단을 창단시켜 도내 및 국내외에서 총 105회의 공연을 실시해 호평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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