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한숙희의 [만남]

'오늘 저녁 6시 반 제주공항 도착'

 20년 넘게 알고 지내는 ㄷ선배가 보낸 문자를 받은 건 5시가 넘어서였다. 비행기를 타기 직전에 보낸 것 같았다.

'오늘 저녁 7시 반에 서귀포 도착, 부부동반'

내가 방송진행자이던 시절 여러번 신세를 진 ㄴ선생이  아내와 함께 왔다는 정보가 핸드폰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10분도 안 되어서였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내가 낼 수 있는 시간은 다음날 하루뿐인데 그렇게 보고 싶던 사람들이 하필 겹칠 게 뭐람.

그런데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ㄷ선배가 ㄴ선생의 부인과 선후배 사이라는 것이 아닌가. 어떤 사회학자는 지구촌의 사람은 6단계만 거치면 다 아는 사람이 된다고 했다. 제주에서는 진작부터 이웃을 사촌도 아니고 삼촌이라고 불렀으니 역시 제주도!!!

우리 네 사람이 만난 것은 다음날 오전 11시 반,

"아이고, 같은 서울에 살면서도 못 보는 사람을 제주도에 와서 보네요"

그들의 독특한 인사에 내가 놀렸다.

"서귀포에서는 아는 사람만 만나는데, 보고싶은 사람은  하루에도 몇 번이든 만날 수 있는데....안 만나지기가 더 어려운데...서울은 참 신기하네...."

관광객을 향한 '원주민'의 염장질은 이렇게 시작 되었다.

우리가 만난 곳은 서귀포 관광 1번지 외돌개 근처, 휴가피크에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외돌개를 간다는 것은 원주민 관광가이드의 수치 아닌가. 그간 개발해놓은 전망 포인트로 그들을 안내했다. 한눈에 서귀포 포구와 새섬, 섶섬과 문섬과 범섬이 쫙 들어오는 잔디밭에 들어서는 순간, 그들의 입은 벌어지고 내 어깨는 펴졌다.

점심메뉴는 메밀복국, 복국은 흔해도 메밀복국은 들어나 봤나, 복국의 반찬은 곰삭은 자리젓이라, 그들은 전율했다.

새연교에서 바람을 맞으며, 마후라 휘날리던 60년대 영화같은 사진 몇장 찍어 주시고, 배들이 머리를 맞대고 있는 포구에서 '나폴리같다'는 관광멘트 한번 날려주시고, 서귀포초등학교의 역사를 증언하는 거목들에게 탄성 한번 올려드리고 나니, 2시 반.

관광객들에겐 당이 땡기는 시각, 이걸 무시하고 강행군을 하면 그날 벌어놓은 점수는 한방에 날아가는 수가 있다. 이중섭 거리 입구의 찻집, 화려한 유리그릇에 층층이 쌓아올린 팥빙수에 찐빵처럼 푸짐한 아이스크림 고명이라니!!

"잠깐 잠깐, 숟가락 대기 전에 사진부터 찍어서......"

서울에 있을 지인들에게 날려주는 스마트한 친절함, 여기에다 '너흰 더운날 뭐 먹니? 우린 마실 물이 없어서 할 수없이 이런 빙수를....ㅠㅠ' 요런 문자를 고명으로 얹어 보내면 염장질 완성.

"크하, 이 시간을 빼기 위해  애쓴 보람이 이 맛일세"

빙수에 깨소금을 셀프 토핑해서 먹는 고소한 이 맛!!
이 명랑발랄한 기운을 모아모아서 이중섭거리 언덕을 올랐다. 모든 상점은 관광객의 방앗간이다. ㄴ 선생은 해녀캐릭터 등산스카프를 골랐고 우리 여자들은 목걸이와 팔찌를 골랐다. 셈을 치르러 나선 ㄴ선생이 우리를 쓱 보더니 말했다.

"목 세 개, 팔 두 개"

예? 나는 팔찌를 안 샀다. 그 재치에 와하하하 웃음이 터졌다. ㄴ선생이 아내에게 팔찌를 채워주었다. 결혼하고 처음 있는 일이라고 했다. '아이구, 그럼 신혼여행이네요' 내 너스레에 그들이 쓴웃음을 지었다. '30년이 다 되는 세월을 함께 살면서 뭐가 그리 바빴던 것일까'

가게 앞에서 패물자랑을 하며 사진을 찍는데 점원이 따라나왔다. 사진을 찍어주려나 보다 했는데 동그란 헝겊에 해녀를 수놓은 부로치를 하나씩 나눠주었다. 덤이었다. '이거 초등학교 1학년 입학할 때 달았던 이름표 같네', 똑같이 가슴에 달고 어릴적의 천진한 마음과 개구진 표정으로 찰칵, 와하하하하 또 웃음이 터졌다. 4시 반, 우리가 만난 지 다섯 시간이 되고 있었다.

"우리가 알고 지낸 20년 보다 오늘 다섯 시간동안 더 많은 걸 했네. 세상에..."
"그러게 말야, 천국이 따로 없네"
"여기 살면 계속 천국이야. 나처럼 눌러 앉읍시다, 뱅기표 취소? 오케이?"
"아, 막판까지 염장질이네"
"생선도 소금을 뿌려야 상하지 않는 거예요"
"맞다 맞다, 정말 힐링이 되었어"

우리는 그렇게 힐링된 몸과 마음을 안고 헤어졌다. 입도하는 순간 뭍에 둔 모든 것을 잊게 하는 제주도, 하늘과 바다와 산과 나무가 동심을 돌려주는 제주도, 20년보다 다섯 시간을 더 많게 만드는 마법의 제주도. 이 다섯시간의 여운으로 우리는 또 살아갈 힘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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