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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서귀포 살던 일본사람들의 비화(秘話)(3)[강정마을촌로의 되돌아본 인생]윤세민/교육자
윤세민 | 승인 2015.11.15 10:57
   
 

■사라호 태풍 때 한 몫 본 고래공장 목조건물

고래공장 목조건물은 임자 없는 건물인지 오랫동안 방치돼 풍파에 지붕이 날리고 한편으로 기울려져 멀리서 보기에도 흉물이라 자연경관이 훼손되고 있었다. 휴지조각도 때로는 요긴하게 쓰이듯 1959년 초강력 태풍 사라호(sarah)피해는 막심했다. 관내 학교건물 피해상황을 문교부 재해공제회에 보고하는데 건물 피해 입증 사진자료로 요긴하게 써 많은 예산을 따왔다는 말에 기발한 착상이었다는 입 소문이 항간에 돌았다. 적산 건물이라 종적 없이 없어지고 말았다.

■평판 좋은 요시다(吉田)상회

사이고(西鄕) 노인 저택 맞은편에는 요시다(吉田)란 젊은 해운사업가의 점포가 있고, 안쪽에는 규모가 넓은 목조건물이 한 채 있었다. 마당도 꽤 넓어 일본 특유의 채소밭이었다.

필자가 여기에 갈 수 있었던 것은 동급생이고 같은 분단원이라 동료의식에서 일본사람들이 가정을 보러 간 것이다. 넓은 다다미방에 들어가 사방을 보면 신기한 물건이 많았다. 만져보고 싶었지만 촌놈이라 할까봐 그저 눈요기하고 말았다.

가미다나(神棚) 모신 방의 분위기는 정감이 들었다. 당시 우리들에게도 가미다나를 모셔 아침에 손뼉 세 번 치고 묵례 하라고 강요했으나 마이동풍이라 그리 쉽사리 우리 가정에 들어서지 못했다. 방 뒷편에는 수거식 변소라 역풍 타 악취가 풍긴다며 문단속 등 세심한 배려를 하고 있었다. 측간은 멀어서 좋다는데 이와는 정반대로 방 칸에 근접해 편의시설로 이용되고 있었다.

당시 우리들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비위생적인 생활방식이었지만 이제는 더 나은 수세식 화장실이 집안에 들어섰으니 예전에 코 막고 용변보던 고통은 잊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격세지감 아닌가. 또 뒤 칸에는 후로(風呂)라는 목욕실이라며, 나와 함께 목욕하자고 제의했으나 허술한 무명 내의가 노출될까봐 고맙지만 나는 대중탕이 좋다며 거절하고 말았다. 일본사람들 목욕문화는 자기네 으뜸문화라고 자랑하듯이 가정마다 상비돼 있었다.

요시다(吉田)학우는 평소에 민족차별 언동이나 우리를 멸시하지 않는 심성이 고운 일본 애라고 우리들 간에 높은 수용점수를 줘 왔다. 헤어져 70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보니 이런 어질고 고운 심성은 곧 아버지의 무릎과 어머니의 가슴에서 싹튼다는 성현의 말씀을 또 한 번 음미해 본다.

이런 학우 미담을 하숙집 어르신이 듣고는 서귀포 사회에서 요시다(吉田) 상회는 평이 좋아 알아주는 상회야 이 상회는 주로 군대환(君代丸, 제주에서 일본 오사카(大阪) 시모노세키(下關)간 화객선) 매표화물운송 하역업을 맡고 있었다. 일본인이라고 뽐내지도 않고 사업권을 독점했다고 권심과 이심(利心)을 버리고 상회를 경영해 왔기에 이런 정평이 입 소문으로 은연중 서귀포 사회에 나 돈 것이다. 뭣도 모른 노인들도 맞장구쳐댔다.

이요시다 학우는 당시 미군의 공세로 현해탄 넘어가기가 구사일생 기로인데도 할아버지가 살고 있는 본국 규슈(九洲)에서 정규 중학교에 다닌다며 우리들과 헤어지고 말았다. 그 전시 와중에 독자를 현해탄을 건너가라는 그 아버지의 용단은 마치 애기(愛機)와 함께 적함에 돌진하는 가미가제(神風) 특공대를 키워낸 아버지와 별 다른 것이 없다. 내 아들이 아니라 천황폐하의 아들이라고 대수롭지 않은 사소한 일을 하는데도 일본 젊은이들은 얏도 기합소리를 내며 정신 집중하는 자세는 아마도 야마도 다마시 기백이 아니었는지!

■일을 하는데도 순서가 있다…과정중심 체험

일본인가정에 노력봉사 요청이 있으면 우리들은 한 번도 가보지 않는 집을 우선 선택해 가봤다. 일등국민이라고 자처해대는 일본인의 가정문화를 눈요기라도 해서 알아보려는 의도가 있었기에 그리 싫지는 않았다. 설탕 배급집에 가는 것과 석유 판매소는 천양지간이었지만 그래도 주인의 온정과 세심한 배려로 얻어지는 것도 많았다. 끝내고 돌아온 우리들은 설탕 냄새에 침깨나 흘린 신세가 한 모금 줘 먹어 보라고 자랑하는가하면, 석유병 손질하던 손때도 재대로 닦지 못하고 비벼대면서도 기름 한 병 줘 야간공부하게 됐다며 기뻐하는 모습은 희비가 교차되는 순간이었다.
살아가는데도 순서가 있어야 하듯이 작은 일에도 차례와 순서를 지켜야 실수 없이 좋은 성과를 얻는다고 일러주신 그 어르신의 말씀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정표와 다름없는 값진 가르침이었다. 지금도 무심코 일본말로 중얼거려진다. 우리들을 노역자로 대해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고 생각하며 해보라는 과정중심의 값진 체험학습의 기회이었다.

■국방헌금 자진 납부

이 학교 고등과 입학시험에는 학과시험, 체력측정, 구두면접이 있었다. 근엄한 일본인 교장 앞에 서니 첫 물음이 나를 바싹 긴장시킬 뿐 아니라 어리둥절케 하는 예상외의 물음이었다. 당시 교육성향이 암기위주이었다. 서너가지나 되는 장편 칙어와 역대 천황 신무(神武)로 소화(昭和)까지 124대를 외워있어야 구두면접에 임하는 기본자세이었다.

지금 전쟁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군용물자는 무엇인가 하이(우리말로 예) 비행기입니다. 이어서 또 묻는 것이다. 아마 정곡을 찔런는지 미소를 띠며 비행기 헌납하려면 그 돈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그 방법을 제시하라는 것이다. 방과 후 노력봉사로 얻은 금액을 전액 국방한금으로 내겠습니다. 그 과정이 그럴듯해 만점이나 받은 기분이라 자신감이 들었다. 긴장감이 풀려 교문에 나와 보니 아버지가 초조함을 감추지 못해 기다리고 있었다.

1원 지폐 한 장을 주며 저녁에 솔동산 강 아무개 하숙집에 있다가 내일 체력검사 마치고 오라며 머나 먼 석양 길 행보에 나서는 아버님을 바라보던 그때 맘이 지금도 은광처럼 빛내주고 있다.

어렵사리 입학하고 나니 매월 국방헌금이란 과제가 부여됐다. 교실 벽면에 개인별 헌금상황 막대표를 게시해 경쟁의식을 유발시키는 통에 꼴찌를 면하려고 자진 참여해 막대그림표가 높아져갔다.

궁하면 통한다고 누구의 착상인지 헌금 만드는 방법은 단 한가지였다. 일본인 가정에는 화덕에 화목을 잘게 쪼개어 넣어 그 화력으로 취사하고 있어 그 대용 땔감으로 솔밭에 떨어지는 솔방울을 주어모아 짚으로 엮어 만든 가마니(포대)에 짊어지고 일본인 가정을 노크했다. 여기에도 단골이 있어 나는 우애다 병원을 자주 찾아갔다. 언제가도 문전박대하지 않고 반갑게 맞아주는 일본인 친절함에 늘 고마웠다. 필요해서가 아니라 학생들이 근로 애국심에 감복해 은화 50전을 건네주던 그 온정을 잊을 수 없었다.

이 병원에 일본군 진료 차 적십자의무대가 임시 진료소를 마련하고 있었다. 중이염에 고생하고 있는 것을 사와무라 교장선생님이 어찌 알았는지 나를 데리고 가 진료해줘 단 한번 진료에 완치돼 평생 잊을 수 없는 병원이었다. 그 고마운 빚을 갗지 못한 멸채(滅債)가 내 맘을 짓눌려 살아가고 있다. 

윤세민  sgp199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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