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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서귀포 살던 일본사람들의 비화(秘話)(4)[강정마을촌로의 되돌아본 인생]윤세민/교육자
윤세민 | 승인 2015.11.15 11:02
   
 

■ 교장 관사 봉사당번

하루 일과를 마치고 교문을 빠져나가는 나를 보고 사와무라 교장선생님은 부엌 칸 청소 좀 도와달라는 것이다. 명령은 아니지만 선생님 말씀이라 하이(일본어. 우리말로 예)라고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당시 봄, 가을 두 번 일본 관리가 우리 농촌을 순회하며 집안청결을 장려해 왔다.

어렸을 적에 검사필증을 대문 기둥에 부착시켜두고 자랑하던 때가 있었다. 집안청소까지 일본관리가 점검한다니 입 밖에 내지 못할 부끄러운 일이었다. 이때마다 집안 청소를 도맡아 해왔기에 부엌 칸 청소과정을 잘 알고 있었다. 천장 거미줄에 주렁주렁 매달려있는 새까만 거스름 털어내는 것이 우선이다. 이 일을 하려면 머리 수건이나 모자를 쓰고 마스크를 착용해서 긴 빗자루로 방바닥 쓸듯이 고약한 작업이었다.

일본인 가정에는 무쇠 솥이 아니라 하얀 솥 두 개가 걸려있고 아궁이에는 철제문이 달려있었다. 작게 쪼갠 장작을 연료로 쓰고 있었다. 분출되는 연기는 굴뚝을 통해 밖에 나간다. 이런 시설이니 몇 년 묵은 취사 방이라도 거스름 한 점 없는 곳이었다. 게다가 화덕 둘레는 하얀 타일로 미장했으니 방에 들어서면 환했다.

교장관사는 학교부지 한 구석에 지어져 그런지 볼품없는 낡은 건물이었다. 게다가 건물 유지관리가 적기에 시행되지 않은 탓인지 창문 개폐에도 어려움이 많았다. 관사 화덕은 재래식화덕이라 부엌 칸 천장에는 거스름 기둥이 주렁주렁 달려있었다.

정성을 다한다고 선생님께서는 손수 자구리 구명물을 떠다 방안에 뿌려댔다. 며칠 후에는 일본 스님이 독경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집에서도 솥 덕 하나 교체하는데도 날 받아 정화수 뿌리곤 했다. 그리고 조왕제(?王)까지 지낸다. 혹시나 동티(動土)날까봐 하루하루를 조심스레 살아오셨다. 이를 지켜보면서 우리의 문화와 유사함을 알 수 있었다. 선생님께서 늘 강조하는 것이 소지품 제자리 놓기, 정리정돈, 쓰레기 없는 교실, 신발정돈까지도 강조하기에 모노오기(物置. 물건 놔두는 곳)로부터 심상과에 다니는 아들 공부방까지 살펴봤다.

■ 사과궤짝 책상과 서제. 그리고 가야금

단칸방 한편에 놓인 통 깊은 일본 사과궤짝 책상과 궤짝을 차곡차곡 쌓아 서재를 꾸며놔 우리를 놀라게 했다. 이것만이 아니었다. 사모님은 찬장으로도 꾸며놨다. 당시 우리들의 고달픈 인생의 상징이었다. 말이 따로 없는 검소한 생활 현장을 목격했다. 가상(家相)을 보지말고 서상(書相)을 보라는 말씀을 자주 해주셨다. 이역만리 서귀포에서 앞 바다에 외로이 떠 있는 문섬을 바라보며 무명의 줄타는 악기(아마 가야금이 아니었을까)를 연주하는 사모님의 고매한 자태에 우리는 그만 매료되고 말았다. 박봉에 의존해 어렵게 살아가면서도 전통악기를 곁에 두고 간간히 줄을 탱겨가며 고운 음률을 은은하게 흘러 보내니 과연 문화국민이로구나. 살벌한 시대상황에 허덕이는 우리들에게 희망의 횃불을 켜주셨다. 아침 대식 무렵에 거리를 걷다 일본 특유의 미소시루(味汁)냄새가 풍기면 우리 간에도 여기가 일본사람 집임을 알 수 있었다.

■신사(神社)참배와 동방 요배(遙拜)

일본인이 숭상하는 아마대라스 오미가미(天照大神)위패를 봉안한 곳을 신사(神社)라 해 성역화하고 신성시 해왔다. 그래서 아무데나 신사자리를 잡지 않았다. 서귀포 마을 맥상(脈上)에 터를 잡았으니 혹시나 우리의 민족정기를 말살하려는 의도가 숨어있었는지 옛 집안 어른들은 조금하면 맥상에 산(墓)쓰는 놈 되지 않는다고 말해왔다.

경내는 삼단으로 나누어 상단에는 위패 봉안 건물. 한 단 내려오면 참배객들이 집회장소, 끝으로 세번째 단은 좀 경사로 돼 진입 통로로 양쪽에 배열돼 있었다. 가운데 직선 통로에는 잔 자갈을 깔아 제관이나 고관이 걸어가면 부서지는듯 한 자갈소리가 들렸다. 서귀실수(實修)학교 학생들은 기숙사 생활이라 참배에 빠지지 않았다.

관공서 기관장을 비롯해 일본인들은 지체없이 모두가 단정한 몸차림으로 나와 그제서야 상면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루가 바쁜데 그럴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의식이 시작되면 그 많은 참배객들의 숨소리가 마저 멈추었는지 신사동산은 일시에 정막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일본 궁성을 향해 드리는 아침 요배도 심층에서 솟는 정기를 모아 정숙한 배례의식이었다. 그러나 천조대신 핏줄 이어받지 못한 우리들은 남모르게 고향 요배를 했다. 이것이 탄로되면 퇴학처분은 물론 부모님 사상검증 요시찰대상이라 입 밖에 내지 못했다.

일본인은 배(拜)하는 것이 진지한데 한국인은 어딘가 건성기가 보인다며 학교에서 호된 질책을 받은 때가 있었다. 한국인의 본성을 모르고 태도와 행동거지만을 봐 수신(修身)교과 점수를 맨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모두가 일본 군국 제국시대 유산이라 나라 잃은 슬픔을 전후세대들은 듣고도 모를 일이다. 신사로 들어가는 입구에 세워 논 도리이(鳥居)는 우리나라 왕릉 묘역 입구에 세운 홍살문을 변형한 것 같으면서 또 천(天)자 모양의 형체 목조물이다. 일본산 회양목으로 정갈하게 만들어 대로변에 세워 놓고 있었다.

그래서 이 앞을 지날 때는 쳐다보지 말고 고개 숙여 지나가는 것이 국민의 몸가짐이라고 계도했으나 성과는 별로고 유언비어만 난무해 순진한 농촌사람들은 겁나 외딴 골목길로 솔동산에 오곤했다. 일본 순검이 망보고 있으니 몸조심하라, 처녀가 불경죄에 걸리면 여지없이 정신대(挺身隊)로 보낸다 등 해괴망측한 괴담이 나도니 경찰은 그렇지 않아도 증오와 격분을 쌓이고 쌓여 언젠가 터질것만 같은 와중에 이런 괴담을 퍼뜨려 다닌다니 이를 색출하려고 신고하면 포상하겠다는 등 강경책으로 맞섰으나 제 식구 감싸지 누가 그 포상금 봐 신고하겠는가.

이런 와중에 815광복을 맞았다. 그 우상의 신사 본채와 눈총 맞은 도리이의 종말은 어떻게 됐을까. 아마 일본인들 고유 문이나 올리고 화형하지 않았을까. 의구심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침략 잔재유산으로 남겨뒀으면…. 지방마다 신사를 세워 참배를 강요해온 그 신사터에는 공공건물이나 교회가 들어섰으나 지명은 여전히 신사터로 전해지고 있다. 

윤세민  sgp199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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