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마을촌로의 되돌아본 인생]윤세민/교육자

■ 재향군인 죽창(竹槍)검술 연마

서귀포에 거주하고 있는 재향군인이라야 겨우 10여명. 모두가 지나(支那)사변에 참전했던 역전의 노병이었다. 미군이 상륙하면 최후의 일인까지 죽창으로 찔러 죽이겠다며 백병(白兵)전 준비에 돌입했다. 이때가 1944년 봄 무렵이다.

미군이 파죽지세로 침공해 오면서 전세는 긴박하게 돌아갔다. 제주 섬에 상륙할 것이라는 풍문이 나돌면서, 재향군인들은 총칼대신 죽창검술 연마로 실전을 방불케 했다. 토평마을 대왓에서 왕대 뿌리 쪽 굳은 대나무를 베어다 불에 달구어 죽창을 만들고 통나무 기둥 둘레에 여러 겁 짚을 엮어 미영결멸(米英決滅)이란 표적을 세워놔 얏 고함지르며 돌진, 죽창으로 표적을 무찌르는 검술 훈련을 학교 공터애서 연마해 왔다. 처음 보는 장면이라 유심히 지켜봤다.

노년기에 든 어른들이 진땀을 흘리며 연마하는 모습을 보니 우리도… 하는 결의에 찬 맨주먹이 불끈해졌다. 역전의 기백은 시들지 않고 여전하구나. 이를 보던 심상과 일본애들은 제 아버지 계급은 꼬조(伍長)다 자랑하더니 그러니 쪼도해이(上等兵), 잇도해이(一等兵)등 계급이 속속 판명돼갔다. 계급의 상하를 모르니 당연지사였다. 계급이 전쟁을 좌우하는 것이 아니다. 전술과 체력이 중요한 것이지. 아버지의 계급자랑 그만두고 힘찬 박수를 보내자. 대일본 만세 환성이 울려 퍼졌다.

■농심을 일깨워 준 선구자. 와다나베(渡邊)

천제연 하류 서쪽 하천 변. 지금 야외 공연 무대 남쪽 길다란 작은 농지에 두동의 목조건물이 눈에 띈다. 지금은 그 농지가 도로용지로 편입돼 없어졌다. 저 외딴곳에서 뭐하며 사는지 보는 이는 누구나 한번쯤은 의아할만한 곳이었다.

한 채는 주택이고 또 한 채는 길다랗게 지어져 다목적 실험 재배실, 농기구, 한 칸에는 젖소와 염소축사였다. 우리들은 근로봉사로 주일에 한두 번 이 농장에 와 아기자기하게 가꾸어 놓은 희귀한 작물들을 만져보면서 관찰 보고서를 쓰는 것이 과제로 돼 있었다. 일명 노작교육이었다.

교실에 갇혀 있다 시원한 대지로 나오니 마치 꽃밭 아나 구경 나온 기분이라 맘이 한결 상쾌했다. 이 농장을 경영하시는 분을 우리는 와다나베(渡邊) 상(님)이라고 불러오다가 나이에 맞지 않은 것 같아 오지-상(아저씨) 존칭을 붙였으나 그리 부를 때는 별로 없었다. 우리끼리는 와다나베 오지-상, 잠시도 쉴새없이 일만하니 일명 시고다(仕事) 부자 또는 황소 할아버지라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남성리 농장에 동행할 때는 우리들보다 발걸음이 빨라 언제나 앞장서 가는 통에 따라가기가 여간 힘들었다. 우리를 단순 노역자로 천대하지 않고 미래의 일꾼들을 키운다는 기대감에서 맞아 주었다. 노작교육을 통해 땀 흘려 일하는 근로정신 함양, 씨앗 뿌리면 거침없이 싹 트고 자라 꽃피고 열매 맺는 자연의 섭리를 체험시키는데 역점을 두어 손 놀림 하나까지도 자상하게 가르쳐 주셨다.

모종을 심는다든지 씨앗을 뿌리고 나면 땅은 절대 거짓이 없으니 성장과정을 지켜보며 작물과 대화하라는 당시 우리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은 말씀이었다. 세간에는 지역 풍토에 알맞은 작물재배기법 연구에 골몰하는 농부박사님이라고 추겨댔다.

친환경 식자재 공급원과 다름없는 텃밭도 보여주었다. 우리들 우영팟에는 무와 배추, 부루(상추), 마늘이 주종인데 여기에는 딴 나라에서나 보는듯한 채소가 심어져 모두가 일본학명이었다. 일년감(토마토), 호랜소(시금치), 후단소(근대나물), 다마네기(양파), 네기(대파) 외에도 서너가지.

일본사람들이 식재료는 우리와 판이했다. 모두가 그림의 떡이었다. 그로부터 아마 30년이 지나서야 우리식탁에 오르게 된 것을 보며 과연 와다나베는 농업선각자로의 이 땅에 자취를 남겼다. 당시 식량공출과 흉년이 해마다 다쳐 보릿고개라는 신조어가 나왔다.

이때 구황(救荒)작물로 고구마를 재배하고 있었다. 지금은 씨앗고구마를 밭에 묻어 그 위에 얇은 비닐을 덮으면 조기에 발아돼 줄기를 잘라 심는데 당시에는 비닐이란 농자재가 없었다. 조기발아만 된다면 그에 따라 생산량은 적기에 증가돼 당면한 현안들이 해결될 것이라는 가설을 전제로 시범 포를 서둘러 만들었다며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온상(溫床)을 보여주었다. 축사에서 나온 거름덩이를 묻어 거기에서 발열되는 열을 이용해 고구마 순을 키우는 시설이었다.

당시에는 생소한 시설이요 기발한 착상이라며 서귀실수학교 학생들, 이웃마을 농가에서도 현장을 보기위해 오곤 했으나 실효성이 없었는지 농가에 보급되지 않는다며 아쉬워하는 기색을 보였다.

연구는 여기에 멈추지 않고 남성리 토지를 임대해서 새로운 시범포를 설치했다. 농부박사는 우리들에게 설명하기를 고구마를 밭이랑에 묻어 놔 그 둘레를 이랑에 있는 작은 돌멩이를 쌓아놓으면 돌에서 발열되는 열로 고구마가 빨리 발아 된다는 것이다. 듣자마자 재미있는 소꿉놀이가 시작됐다. 넓은 밭은 온통 각양각색의 작은 성곽으로 채워졌다.

2월의 따듯한 햇살을 받아 하루빨리 발아돼 농부박사님의 만면에 희색이 가득하기를 우리들은 빌었다. 그러나 지나던 동네사람들은 우리들이 해놓은 것을 보고 일없는 사람이 할 노릇이 한 시간이 바쁜 와중에 누가 하겠는가. 천금이 나온다 해도 우리는 못할 것이다 이 말을 농부박사님이 들었다면 얼마나 실망하겠는가. 시국이 시국이라 그 이후 어떻게 됐는지 종무소식이라 가 볼 기회가 없었다. 실패작이라는 소식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 강정 큰 내물을 막으려는 야심찬 수리사업

강정마을은 예로부터 살기 좋은 농촌이라 그 대명사로 일 강정이라 해왔다. 도처에 물이 솟아 나 논밭이 넓기 때문이다. 큰 내물은 조금도 농수로 이용되지 않고 바다로 흘러 보내고 있다. 이를 지켜보던 와다나베는 보(洑)를 설치해 가둔 다량의 물로 광활한 강정들판을 논밭으로 만들자는 계획을 세워 보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당시 공법으로는 냇물이 범람했을 때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유실되고 말았다. 그래도 미련이 있어 소하천 물을 끌어다 물방아를 만들었다. 주민들이 이용해 줘야 물방아는 돌겠는데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다. 당시 곳곳에 있는 연자방아 전성시대이고 곡물을 물방아까지 운반하는데 원거리라 외면당하고 말았다. 그러니 타산이 맞지 않아 폐업하고 말았다.

광복이후에도 시멘트 구조물이 남아있어 노년층에서는 지금도 도변(渡邊)이 물방아를 거론하며 당시의 상황을 전해 줘 그간의 이루었던 업적을 개관하면 개척과 도전정신이 왕성한 선구자이었다.

이외에도 일본인은 서귀포의 기후풍토에 알맞은 원예작물을 심어 농원을 이루었다.

그 한곳이 하논 밀감 과수원이었다. 지금은 품종이 갱신돼 성과수원이 되고 있을게다. 일본인이 땀으로 이루어 논 첫 과수원인 것이다. 생산량이 그리 많지 않아 연말에 일본인가정이나 관공서에 공급될 정도의 소량이었다. 당시 우리 신분으로는 그림의 떡이었다.

일본 사람들은 양력 정월 초하루 아침에는 현관문 위에 굵게 엮은 짚 끈(시매나와)에 밀감 세 개를 나란히 매달아 축원하는 풍습이 이색적이었다. 얄궂은 애들은 눈여겨 봐 두었다 야밤에 그 밀감을 따 먹어 버려 일본인들로부터 원성사기도 했다. 이를 미연에 방비하느라 심성이 너그러운 어떤 분은 별도로 밀감은 봉지에 담아 매달아 두는 분도 있었다. 경영주는 다르지만 지금의 서귀여중 근처에 배나무 과수원이 있어 우리들은 종이봉지 씌우기 노력봉사를 해 왔다. 배 과수는 지역풍토에 맞지 않아서 그런지 모양새가 좋지 않음 뿐더러 당도가 낮아 시중에 유통되지 않아 이것도 그림의 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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