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마을 촌로의 되돌아 본 인생]윤세민 / 원로교육자

■ 우에다(植田) 병원

솔동산 아래 천제연으로 가는 길목에 서귀포에 단 하나밖에 없는 우에다 병원이 있었다. 병원하면 오늘 우리들이 드나드는 동네병원을 연상하겠지만 당시 의료시설은 워낙 영세해 집 한 채에 살림방과 작은 칸은 진찰실이다. 입원실과 응급환자실도 없었다. 의료장비는 고사하고 구급차도 없었다. 진찰실에는 청진기, 소독기구함, 핀셋, 주사기 등이 놓여있을 뿐 청진기와 주사기를 빼면 도시학교 양호실에 온 기분이 들 정도로 의료설비가 미비했다.

학교교의에 위촉돼 학년 초 병원에 가 신체검사를 받았다. 종종 왕진가방 들고 일본인 가정에 가는 것을 보면 소아과나 내과 전문의 같기도 한데 나는 이 병원에서 난치병이 안치돼 큰 덕분을 본 병원이라 지금도 그 옛집 앞을 지날 때는 머뭇거려진다.

막바지 전시(戰時)태세에 돌입하면서 학생들이 수영능력 평가를 하겠으니 더 연습해 두라는 예고가 있어 연습하다 그만 중이염이 발병해 초기에 민간요법을 다 써봐도 증상은 날로 악화돼 고름이 흘러내려 악취까지 동반하니 영 죽을 지경이었다.

어찌할 것인가 단칸방 하숙방에서 출렁거리는 귀가를 쓰다듬으며 새날을 기다려 볼 수밖에 별 방법이 없었다. 죽을 중병은 아니니 자위하면서 고통을 참아가며 등교하다보니 때 마침 일본군 진료 차 왔던 적십자 의무대가 우에다 병원에 임시 진료소를 차리고 진료업무를 본다는 소식을 교장선생님은 먼저 알고 등교하자마자 나를 데리고 갔다. 교장선생님은 몸부림 칠 것으로 미리 알고 나를 꼼짝달싹할 수없이 부둥켜안았다. 이때 선생님 몸체에서 풍기는 특이한 일본 향취의 감흥이 감지됐다. 그 따스한 온기는 마치 어머니의 품안에서 느껴보는 감동이었다. 통통부어오른 귓구멍을 쑤셔대는데 이를 악물고 참았다. 진료는 끝났다. 일본군 의사가 하는 말이 학생 장하다(애라이 데스네). 하루가 다르게 증상이 나아져 왕따 당하지 않고 집중력도 나아져 갔다. 조선학생이라고 버리지 않고 나를 진료해주신 선생님의 높은 은덕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강정 토산명품인 은어구이로 답례는 했지만 아직도 큰 빚짐을 짊어지고 살아가고 있다. 이 기회를 놓쳤다면 아마 평생 보청기 신세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 우에다 병원과의 둘째 인연

1945년 8월 15일 학습게시판에는 오후 삼매봉 포대구축작업 2학년 포대구축도 하루 이틀이지 만날 파 놔도 기관총 없는 포대구축 맥 빠진 근로보국작업이었다. 막 떠나려는 순간 작업 중지한다는 희소식이 교내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대낮에 미국 정찰기가 곡예 비행하는데도 고사포 한방 쏘지 못하는 시세에 무슨 중대방송인가. 당시 서귀포에 동경 대본영(大本營)방송 청취시설은 인본인 가정에 안하여 허가제로 열대 이내로 추산된다. 라디오 시설이 돼 있는 집은 두 개의 안테나 기둥에 연결된 전선을 봐 알 수 있었다. 학년별로 수신시설이 돼 있는 일본인 가정에 배정돼 간 곳이 우에다 병원이었다. 서둘다보니 좀 늦어 들어갔다. 병원장 부부는 잡음이 끽끽대는 긴 수신박스에 귀 대어 듣는 모습이 침울했다. 천황폐하의 떨리는 목소리만 들어도 의기양양했던 그 기백을 잃어버린 풀죽은 특별담화임을 알 수 있었다. 방송청취차 나갔던 학생들은 뭔 말들을 많이 하는지 분간할 수 없이 왁작거렸다.

◆학교장의 종전 고별 훈화 그리고 이별

특별방송 청취 후 전교생 54명을 한 교실에 모여 앉히고 사와무라 교장선생님은 전례없이 침통한 표정으로 격분을 참아가며 기염을 토하는 것이다. 오늘로 전쟁은 끝났다. 이기지 못한 것이 한이다. 우리 일본인들은 부모님과 함께 본국으로 돌아간다. 조선은 곧 독립될 것이다. 그러면 자라나는 너희들 사이좋게 지내며 살아가야 한다. 이런 요지의 짤막한 고별사이었다. 듣자하니 어처구니없기도 하고 그네들이 동정을 보니 의리감도 났다. 잠자다 깬 어린애 마냥 멍해 듣고는 분간할 수 없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정의는 승리한다. 너희들은 장차 동남아 여러 나라에 나가 대일본의 국위를 선양할 꿈나무라며 추겨대던데 그 진의는 온데간데없이 허언이 되고 말았다. 원자폭탄 한방에 그 야마도 다마시도 혼비백산 손들고 만 것이다.

고별사를 듣고 나니 한국인 학생들의 안면에는 누구나 할 것 없이 살며시 희색이 떠오르는 기색이 보였다. 학과공부를 뒤로 미루고 매일 지겨운 근로보국 노력봉사, 툭하면 조센징, 나라 잃은 의분 등을 생각하니 잘됐다. 올 것이 왔구나! 그간의 쌓였던 응어리가 일시에 표출된 것이다. 존경과 사랑으로 맺어온 스승과 제자와의 교육애와 이마를 맞대어가며 진리탐구에 정진해오던 학우와의 우정은 학교장의 짤막한 몇 마디로 그간의 첩첩이 쌓아 논 적공(積功)탑은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우리들은 얼싸 좋다고 반듯한 인사 한마디도 없이 각자 고향집에 와 그 이후 스승님과 학우들이 귀국 동정에 무관심 한 것이 얼마나 무례한 처사인지 두고두고 통탄(痛歎)해진다. 죽을죄를 져 살아가려니 통한(痛恨)이 오는구나. 사은회, 송별회 보은행사 생각조차 못하도록 우리의 맘을 짓밟지 않았는데도…

지금에야 자문해보면 물과 기름이 한 기물에 부어 넣어 흔들어 봐도 혼합되지 않고 층이 생기듯이 핏줄이 다른 민족이 이질감과 당시 상황이 삭막해져가 교감이 일시에 단절되고 만 것이 아닌가. 이웃 서귀초등학교 졸업생들은 한일수교 이후 일본에 생존해 있던 은사님을 초청해 사은회를 열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더욱 죄책감이 들었다. 초청받은 일본인 교사도 제자들과 동승해 서귀포로 오는 516도로 교량 표지석을 보고는 내가 습자(서예)시간에 너희들에게 가르쳐준 서체라며 누가 썼느냐고 묻더라는 것이다. 예 제가 썼습니다 제자를 잊지 않고 늘 상심해온 교육자의 숙념에는 국경이 없는 법. 이역만리에서 내가 걸어온 교육자취를 보는 순간이 얼마나 흐뭇했을까. 제자를 키워낸 교육자가 아니곤 이 희열감을 모를 것이다. 순식간에 세상이 변천돼도 초상난 집 앞에서 조국광복의 환희 굿판을 벌일 비정한 우리들은 아니었다.

◆ 환송객 없는 외로운 귀국

일본인들은 한때 특권을 누렸지만 포악하다. 모리배마냥 착취한다든지 하는 원성도 없이 전시태세에 대응하느라 분수에 맞게 살아왔다. 그러면서 이루어 논 소중한 자산을 남겨두고 가려니 얼마나 통절(痛切)했을까. 그리고 솔동산 거리가 내 세상 다 된양 의기양양하게 활보하던 그 군인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일본인 점포나 대문 칸은 닫혀버려 거리가 정막해져갔다.

요즘같은 통신매체가 다양한 세상이라면 시시로 귀국동정을 물어보며 떠나는 뱃머리로 달려갔을 것이다. 학교장의 고별사를 듣고는 얼싸 좋다고 고향에 와 만사태평 지내다보니 매정한 제자가 되고 말았다. 나중에 학우들에게 듣건데 서귀포에 거주하던 몇 학생은 그래도 귀국 짐을 챙기는데 조력했다니 그래도 석별의 아쉬움은 남았다. 스승과 제자간의 사랑으로 맺은 숭고한 정을 지워버릴 수 없는 고통을 애별리고(愛別籬苦)라고 선인들은 이 심경을 빗대어 말한 것 같아 알만하다.

당시 서귀포에 살던 일본인들은 출신지가 달랐다. 상업분야에는 규슈(九州)출신이 태반이었고 관공서분야에는 본토 또는 시코쿠(四國) 등 달라 지역별로 기동성을 대절해 언제 간다는 소문도 없이 자기들끼리 조용히 떠났다고 한다. 정 많은 이웃 한국인들도 한 때 석별의 아쉬움은 떠나면서 다정했던 한국인에게 다다미방이랑 보존해두면 언젠가는 오겠다며… 이 말은 향수에 저린 당부로만 듣고 거기에 우리는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한치없이 곱게 보내준 한국인의 고운 심성을 그제서야 알았을 것이다.

일본사람들이 그간의 행적이 야박했다면 틀림없이 소요사태도 있을 법 한데 사회는 평온했다. 조선총독은 815를 훨씬 넘긴 9월 28일에야 미 128보병연대 그린대령과 38명 장교와 사병 앞에서 항복문서 서명을 함으로 통치권을 잃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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