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마을촌로의 되돌아본 인생]윤세민/원로교육자

황금 덩어리를 준다 해도 맞바꿀 수 없는 값지고 소중한 아버지의 일기장을 여태까지 나의 애장품으로 간직하고 있다. 가끔 곤비(困憊)할  때마다 읽고 나면 맘이 평온해진다. 일제강점기에 애절과 비통을 슬기롭게 극복한 삶의 예지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 일기장은 중.일 양국 간 전면전쟁이 시작되면서 한국인에게는 일본어 사용을 강제로, 남경함락 축제행사. 이듬해에는 조선 육군특별 지원병제도 신설, 조선 교육령개정 공포해 중등학교에서 조선어과목을 폐지하는 등, 일제식민통치가 막 무르익은 1937년 당시 나이 27세에 강정 광제의숙(6년제 개량서당) 교사 재직 시의 학사업무와 처절했던 집안 사정과 제주의 세시풍속, 경제활동 그리고 농경문화를 짤막하게 일어로 적은 것이다.

이 해 내 나이 만 6세, 기억력이 꽤 성숙 되던 시기였다. 그래서 일기장을 넘겨다 볼 수록 주마등 처럼 옛일이 어렴풋이나마 머리에 떠올라 동심에 사로잡혀 그리워진다.

표제지에 울긋불긋 박아낸 일본 육군전력 부대 배치도만 봐도 일본의 악랄했던 침략군국주의를 실감할 수 있다. 중국 천진에는 이미 주둔군 사령부가 배치되는 등 한반도를 삼키고 나니, 중국대륙 본토에 군침이 당겨 막강한 전투력 증배로 중일전쟁 촉발 직전임을 암시해 주고 있다.

이렇게 사생활 문화 일기장에까지 전운이 짙게 깔린 것은 패망을 자초한 역사의 교훈인 것이다.

첫 간지에 27세 되던 해의 토정비결 괘사(卦辭) 형운을 옮겨 놔 소망이 여의하니 날로 천금을 얻는다 (所望如意 日得 千金) 자성 예언에 부풀어 비운의 한 해를 슬기롭게 넘긴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당시 농촌 경제규모가 매우 열악해 큰 빚이 노부모 상례 삼년상 치루기였다. 게다가 겹상을 겪어본 사람들은 기둥굽이 파인다는 의미심장한 말들을 해왔다. 그래서 불의에 당하는 곤경을 대비하느라 고의계(顧儀契)와 친목계에 동참해 상부상조의 미덕을 선양해 왔다.

조부 상기(喪期)에 증조모님이 병석에 몸 재워 누우니 장손인 아버지는 백방으로 명의를 찾아 한방약으로 간병해 온 애절한 구절에는 가슴이 뭉클해진다. 장지는 암매장 단속이 심한 때라 극비에 부쳐 도순마을 상경 폭낭동산 아래 타인의 경작이였다.

성분이 다 될 무렵 상두꾼들이 뒤숭숭 하더니 번쩍이는 긴 칼 찬 일본 관헌 순사가 나타나 혼비백산 장 밭은 마치 맹꽁이 울어대던 연못에 돌 던진 공포 분위기로 살벌해졌다.

삼베 누더기 옷 같은 제복으로 몸을 가누지 못했던 아버지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기세당당하게 마주쳐 설득력 있는 대화로 돌려보내고 말았다.

당시의 비통한 심정을 몇 줄 적어 놔, 당시 상황을 어렴풋이 떠올라 비통했던 심상을 생각하니 가슴이 메인다. 당시 장묘문화는 공동묘지에 매장하는 것이 불효라며 꺼려왔다.

그래서 명 지관(地官)을 모셔와 좋은 산 터를 마련하려고 상복 입은채 지관 따라 나섰다.

남이 경작지에 안장하고 나서야 지주를 찾아 가 텃새를 물면 되는 너그러운 세상이었다.

이렇다가는 경작지가 잠식된다며 계도하고 법 위반 시에는 처벌해 왔다. 이런 장묘문화가 60년대까지 이어져 왔다.

▲ 윤세민씨가 보관하고 있던 부친의 일기장.

며칠이 지나 중문 경찰관 주재소 간 기록이 이어진다. 아마 시한부 이묘 각서 제출과 과료 20원(당시 서당 교사 월급 17원) 처분으로 일은 마무리 됐으나 시종이 여의치 않아 심적 고통을 안고 살아오다, 삼년상 치루고 난 이듬해 육소장 명당을 구산해 이묘하고 나니 가운이 평온해 졌다는 일화가 구전돼 왔다.

이 해 정축년 2월25일은 한식날이었다. 한식, 단오명정을 강제 철폐하기 위해 일본 관헌들이 가호를 방문하는 통에 선조 제위전에 앞으로 한식 단오 명절은 사세불체(事勢不逮)지제 하옵고, 설 명절은 앙력설로 지내오니 흠향하옵소서축고 함으로써 농경문화의 지고한 명절은 영 잊고 말았다.

보릿고개 전후 절기에 맞는 명절이라 제찬도 넉넉지 못하나 애들은 보리 묵 점 부스러기라도 얻어 먹는 재미로 기다려 왔다. 그러나 어른들은 여름농사 부종 등 농사일로 눈 코 뜰 새 없는 절기라 정성이 부족함을 자탄해 왔다.

암울한 그 무렵 서당학교에서 현장학습을 시도한 것은 경이적이고 내용도 다양해 지난 날 교직생활이 너무나 무색해진다.

최근에 개수한 중문 천제연 다리 시공 때 다녀와 공사가 거창해 장관(壯觀)이다. 짤막하게 소감을 적어 놨다.

그러니 1937년도 시공한 것을 확연히 알 수 있다. 한때는 모슬포 비행장에 다녀와 말미에 백문이불여일견고사 구절로 맺고 말았다. 그토록 꿈에 안고 사신 아머님의 명복을 기리며 천추의 분한(憤恨)이 솟구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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