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한숙희의 [만남]

제주에서 여성영화제가 열린다는 소식은 내게 가뭄의 단비였다. 서귀포에 와서 살면서 별로 아쉬운 것이 없는데 가끔 영화가 보고 싶었다. 핫한 흥행영화도 좋지만 삶을 돌아보고 인생을 관조할 수 있는 그런 영화가 가끔 그리웠다.

영화제 개막식날, 어머니를 모시고 한라산을 넘어 제주시로 갔다. 밤시간 외출을 거의 안하시는 어머니로서는 새로운 도전이었다. 개막식이라고 특별한 이벤트가 있었다. 가장 무도회처럼 얼굴에 가면을 쓰고 사진을 찍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여기에도 도전하셨다. 화려한 깃털 가면에 꽃다발, 주변사람들이 꾸며 주는 대로 마다치 않고 받아들이셨다. 이왕이면 더 재미있자! 나는 노랑머리 가발까지 쓰고 포토존에 섰다. 어머니와 추억할 거리가 하나 늘어나고 있었다.

개막작 <나의 사랑스런, 개같은 인생>은 멕시코가 무대였다. 사랑스런과 개같은의 조합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자리에 앉았다.

멕시코는 정열적이고 파워풀한 사람들의 나라였다. 그들은 연인과의 데이트, 생일파티, 장례식, 삶의 크고 작은 모든 순간에 음악을 잊지 않았다. 그래서 기타나 바이올린을 연주하며 거리에서 또는 행사장에서 노래를 해주고 돈을 버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마리아치라고 불렸다. 1인당 10페소(707원)를 받으면서도 정성을 다하여 그들을 축하하고 위로하는 이들은 심리치료사이며, 풍부한  성량과 감정으로 멕시코의 전통음악을 이어가는 무형문화재였다.

내가 가장 감명을 받은 것은 죽음의 신에 대한 이 나라 사람들의 경배였다. 해골형상의 죽음의 신을 보면서 끔찍하고 세련되지 못했다고 생각한 것은 내 경박함의 소치였다.

"이 피부를 한 겹 벗겨내면 우리가 뭐겠어요. 바로 저 모습이죠"

중년의 한 여성이 죽음의 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니 살아있을 때 멋지게 즐겨라, 그게 인생이죠"

제대로 살고 싶다면 죽음을 항상 곁에 두고 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미리 쓰는 유서를 경험한 사람들은 많은 걱정에서 놓여났다고 한다.

멕시코 사람들의 현실은 힘들다. 인구 1억명이 넘고 영토도 광활하여 잘 살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지만 부패한 정치에 재벌 편중의 경제 시스템으로 국민 대다수는 가난하다. 사랑스런과 개같은이 조합된 인생인 것이다. 그런 조건에서 자신의 삶을 멋지게 살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내는 사람들의 모습이 존경스러웠다.

왕년의 할리우드 스타 더스틴 호프만, 그가 노년의 사랑을 구현하는 로맨틱 가이로 나오는 <에시오 트롯: 거북아 거북아>는 정말 유쾌했다.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순간부터 사랑하게 된 두 남녀, 그러나 마음을 드러내지 못한 채 다정한 이웃으로 지내며 5년동안 서로에게 고백할 순간을 기다린다. 물론 자기만 짝사랑하는 줄로 믿으면서. 영화제목, 에시오 트롯(esiotrot)은 거북이(tortoise)를 거꾸로 쓴 말이다.

그가 그녀의 반려동물 거북이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여자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여자에게 기쁨과 행복을 주려는 마음에서였다. 나중에 거북이를 바꿔치기한 사실을 안 여자는 남자에게 놀림을 당한 것 같아 상처를 받지만, 결국 그것이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고 해피엔딩한다.

영화가 끝나고 함께 보았던 친구들이 어머니께 농담을 걸었다. "어머니, 혹시 이웃에 영감님 안 사세요?"

86세 되신 어머니가 연애에 도전을 받으신 것이다. 어머니는 못 들으신 듯 웃기만 하셨다. 그러나 그게 무슨 상관이랴, 늙으면 모든 게 끝인 것처럼 생각하지 않고 모든 가능성을 항상 열어 두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닷새간의 영화제는 나에게도 도전이었다. <아니타 힐>, 오직 진실은 밝혀져야 한다는 신념으로 성희롱을 은폐하려는 권력에 대항해 오고 있는 그에게 나는 배워야 할 게 많았다. <여전히 사랑하고 있습니다>는 늙음과 성에 대한 성찰을 주었고, <위로공단>은 계속되는 한국여성의 차별적 현실을 각성시켰으며, <그림 그리는 해녀>는 제주에서 보아 더 각별했다. 

영화제는 끝났지만 내 삶에서 실천은 이제부터다. 영화는 언제나 도전을 준다. 그래서 영화는 사람을 설레게 한다. 영화제를 마련해 준 제주여민회, 감사합니다. 내년에도 부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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