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한숙희의 [만남]

우리 어머니는 딸부잣집의 둘째 딸이다. 여동생 셋을 보고 그 다음에 남동생을 보았는데 지금도 그때 이야기를 하신다.

엄마가 할머니 모시고 황해도 수양산으로 백일기도를 드리러 다니셨지. 나는 여덟 살이었지만 속으로 비웃었어. 백일기도 드린다고 아들을 낳는 게 말이 되냐고. 그런데 정말 너희 외삼촌이 태어난 거야. 딸만 낳는다고 할머니께 구박 당하던 어머니의 설움도 드디어 끝이 났지. 그때부터 기도의 힘을 믿게 되었어. 지성이면 감천이다, 그런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더라.

어머니의 회고담을 반복해서 들으면서 나는 점점 기도보다는 백이라는 숫자에 주목하게 되었다. 작심삼일, 사람의 마음이란 본시 변덕스러워 3일을 넘기기가 어렵다는 것인데 30일도 아니고 100일이라니.

익힐 습(習)자는 새가 날기 위해서는 100(百)번의 날갯짓(羽)을 해야한다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곰에서 사람이 된 웅녀도 마늘과 쑥만 먹으며 어두운 동굴에서 인내한 시간이 100일이었다. 아기들도 태어나서 100일이 되면 땅에서 살 수 있는 내공이 생겼다고 백일 잔치를 하며 기뻐한다.

이렇게 대단한 100이 하나도 아니고 열이면 어떻게 될까.

내가 1000이라는 숫자의 힘을 충격적으로 느낀 것은 전영록이라는 가수의 노래 <종이학>에서 였다.

천 번을 접어야만 학이 되는 사연을…

아, 천번을 접으면 종이도 학이 되어 날 수 있구나. 천은 정말 대단한 숫자구나. 그 노래가 대히트하면서 소녀팬들이 가수오빠에게 종이학 천마리를 접어다 주는 것으로 팬심을 전하는 것이 유행했었다. 그후 천마리 학의 신화는 대중적으로 더 퍼져서 소원이 이루어진다, 행운이 온다,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갖게 했다. 인터넷을 검색하면 청춘남녀가 사랑을 이루기 위해 천마리 학을 놓고 정보를 교류하는 내용이 적잖이 나온다. 물에 젖지 않는 친환경 종이부터, 학을 담을 병, 시간이 없다면 우선 365마리만 접어도 꽤 효과가 있더라는 깨알같은 경험담, 심지어 2주일 만에 천마리 접어주는데 얼마라는 가격도 나와 있다.

히트곡은 지나갔어도 사람들이 아직까지 천개의 학에 연연한 것은 그만큼 이루고 싶은 소원과 이루고 싶은 사랑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서귀포신문 지령 1000호, 매주 수요일 마감에 쫓겨 글을 쓰다가 어느날 갑자기 마주친 지령 1000호, 그 앞에서 나는 정말 많이 감격했다. 지구력 없는 내가 1000이라는 숫자와 만나다니, 감사합니다!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천일동안, 천년의 사랑 이런 노래가 유행하는 세상에 살면서 나도 이미 1000의 포로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니, 지령 1000호에 이르도록 신문을 만들어 온 사람들의 지극정성에 사로 잡혀 있었던 것이 더 클 것이다.

맨처음 서귀포신문에 만남 컬럼을 시작할 때 만난 사람은 최미란 기자였다. 이름이 기자일뿐 그는 총무와 영업까지 일인 다역을 하는, 천수천안의 보살같은 사람이었다.

정기구독 1년치가 우편료 포함 4만원인데, 사람들이 구독은 하지 않고 수고한다고 밥을 사준다고 해요. 밥값이 훨씬 더 드는데… 이상하죠?  사람들이 신문구독을 해주는 게 휠씬 더 좋은데…

처음 신문사를 방문했을 때도 잊지 못한다. 영화세트장에 온 느낌이었다. 열 평 좀 넘어뵈는 공간은 세련된 사무실이 아니었다. 낡은 책상들, 앉으면 푹 꺼지는 소파, 쌓여있는 신문들, 오래된 교실냄새가 났다. 기자라고 하는 사람들은 조금씩 까칠해 뵈기 마련인데 이현모 편집국장이나 양용주 기자는 나를 반기면서도 수줍어하는 표정이 기자라기 보다 순박한 만화 주인공들 같았다.

어느 목요일 아침, 신문을 일찍 받으려고 신문사에 들렀다가 깜짝 놀랐다. 기자 세 사람이 앉아서 신문을 접어 발송 봉투에 넣고 있는 게 아닌가. 신문이 나오는 날은 새벽부터 나와서 이렇게 손작업을 해왔다니 아무리 봐도 이들은 요즘 사람들이 아니었다. 드물어서 귀해진 골동품 같은 마음의 소유자들이었다. 웃으면서 일하는 모습에 나도 언젠가 한번 이 재미진 일에 동참해보고 싶다는 마음까지 들었었다. 

종이학이 아니라 신문을 천 번 접으면서 이들은 무슨 소원을 빌었을까. 이들이 이루고 싶은 사랑은 무엇일까.

서귀포신문은 서귀포시민 500여명을 주주로 하여 1996년 2월 12일 창간호를 발행하며 지역신문의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주간신문이자 종합신문으로서…서귀포시의 지역뉴스를 중점적으로 보도하는…서귀포시의 유일한 지역언론… 2006년 8월부터는 인터넷신문도 등록 창간하여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한국 향토 문화 전자 대전>에 소개된 서귀포신문이다.

서귀포 사람들, 그들의 크고 작은 삶을 부지런히 기록해 가는 일을 앞으로 또 천 번 하는 것이 이들의 소원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나에게 원고료 대신 밥을 한번 사주마고 약속한 게 언제 적인데 일요일에도 연락해보면 행사장에 나와있어 곤란하다고 부도수표를 날리겠는가. 내, 이번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반드시 이들과 같이 밥을 먹으리라. 1000이라는 숫자는 반드시 축하해야 하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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