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한숙희의 [만남]

"어머, 벌써 물에서 다 나오셨나봐요."

남원 해녀탈의장 앞에서 나는 발을 동동 굴렀다. 오후 1시나 되어야 배가 들어온다고 해서 12시 반에 왔는데 벌써 옷을 갈아입고 삼삼오오 귀가하고 있는 게 아닌가.

"아니우다. 상군들은 들어오는 중이우다. 저기 배가 보이네요"

나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제주에 와서 내가 가장 사귀고 싶었던 사람이 해녀들이었다. 나에게 그들은 물음표인 동시에 느낌표였다. 평범한 일상을 사는 아주망이나 할망이 고무옷만 입으면 물속의 수퍼우먼이 되고 고무옷만 벗으면 바로 밋밋한 범인(凡人)으로 돌아오는 신기하면서도 감동적인 존재가 그들이었다. 마침 제주 문화방송에서 <다큐멘타리 길>이라는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일에 리포터로 함께 하면서 바야흐로 그들과 자연스럽게 친해질 수 있는 길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상군들은 저만큼에서 내려 헤엄을 쳐 나왔다. 어장입구까지는 물이 얕아 배가 올 수 없었다. 그들은 물에서 나오기 전에 망사리부터 건져 올렸다. 요즘은 소라철이라더니 망사리 가득 소라였다. 어촌계장님이 운전하는 인양기가 망사리를 쑥 들어올리면 그제야 해녀들이 물밖으로 올라왔다.

"아이고, 아는 얼굴이네"

머리부터 발끝까지 고무옷으로 무장한 채 두 손을 번쩍 들어 나를 반기는 이 분은 누구신가? 자세히 보니 며칠 전 해녀축제장에서 만났던 삼촌이었다. 아침에 나가 점심이 지나도록 물질을 하고 온 끝이니 지치고도 지쳤을 텐데 활짝 웃음으로 반겨주시니 감동이었다.

"세상에, 이 무거운 것을, 아무리 바닷물속이라도…"

망사리 소라들을 저울에 달기 위해 네모난 플라스틱 바구니에 쏟아넣는 일을 돕다가 나는 그 무게에 깜짝 놀랐다.

"무거운 건 둘째치고 아주 위험해요. 소라뿔이 칼보다 예리해서 신발도 찢어질 정도예요"

인양기를 운전하던 어촌계장님이 맨손으로 망사리를 드는 나를 걱정하시며 말씀하셨다. 그분도 해녀들의 고된 작업을 돕기 위해 인양기를 고안하셨다고 했다.

"자, 이거 먹어봐"

플라스틱 바구니에 소라를 쏟자마자 해녀삼촌이 내게 소라를 내밀었다. 가장 굵어보이는 것을 두 개씩이나. 아니라고 손사래를 쳤지만 소용없었다.

"지금 깨서 바로 먹으면 싱싱해서 좋아"

당장 먹으라고 하시는데  어찌해야 하나. 그런데 삼촌이 아무 말없이 물가쪽으로 저벅저벅 걸어가는 게 아닌가. 그러더니 허리춤에 찬 비창을 뽑아 소라껍질을 깨더니 내장을 끊어내고는 짠물에 얼른 헹궈 알맹이만 내 입에 넣어주는 게 아닌가.

"어때? 맛있지!"

입안에 소라가 가득해서 고개만 끄덕였다.

"이렇게 신선한 소라를 먹어본 사람이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

나는 속으로 너무 고맙고 미안해서 울컥했다.

"힘들게 따오신 걸 이렇게 주시면 어떻게 해요?"
"에이, 힘들게 해 온거니까 주지"

얼굴 가득 흐뭇한 미소를 머금은 그 분의 얼굴이 햇빛을 받아 보석처럼 반짝였다. 휑하니 돌아서서 소라 무게를 달러 가는 그 분을 보면서 또 물음표가 그려졌다.

도대체 저 분들의 마음 속은 어떻게 생겼을까?  당장 코 앞에서 돈이 될 것을 선뜻 내주고 자신이 더 기뻐하는 저 마음은 도대체 어디서 생겨나온 것일까?

다음 촬영지는 하도리 해녀박물관이었다. 이미 두어번 돌아본 박물관이었지만 해녀삼촌들의 도타운 정을 가까이에서 느끼고 난 다음에는 모든 것이 달라 보였다.

이 물소중이에 수 놓은 것을 좀 보세요. 이건 지금 80세쯤 되신 해녀분이 젊어서 입던 것을 기증해 주신 건데요, 육지에 원정 물질 나갔을 때, 남는 시간에 수를 놓으셨대요. 해녀들은 이렇게 부지런하고 솜씨도 좋아요. 작업복을 예쁘게 장식하는 이 마음, 해녀들이 억센줄로만 알려져 있지만 여성스런 감수성을 많이 가지고 있답니다

박물관 해설사가 알뜰살뜰 설명해주는 해녀들의 삶을 배워갈수록 느낌표가 더해지고 더해졌다. 상군들이 애기해녀 망사리에 전복을 덥석 넣어주어 격려하는 모습, 나이든 해녀들을 위해  할망바당을 두는 전통, 해녀들이 돈을 모아 학교도 세우고 마을이장 수고비도 주었다는 기록, 들으면 들을수록 감동에 감동이 이어지더니 마침내 내 가슴에 결론이 새겨졌다.

'이들은 살아있는 여신이구나. 사람이 사람과 어떻게 더불어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주는 오래된 미래구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 이름 해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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