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한숙희의 [만남]

집안 어른 다섯 분이 제주에 오셨다. 평균연령 81세, 그 중 세 분은 보조장비나 부축이 없이는 걷거나 오래 서 있기가 힘드신 상황이었다. 그 자식들이 해외여행이 무리가 되지 않을까 적잖이 걱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어른들은 한사코 제주를 고집하셨다. 특히 91세 되신 이모부님은 여름내 무릎이 아파 고생을 하셨는데 제주여행을 목표로 열심히 물리치료를 받으시고 집에서도 쉬지 않고 운동을 하셨다고 했다.

그 이유는 아름다운 자연환경에도 있었지만 더 큰 이유는 우리 어머니의 제주살이가 어떠한가를 직접 확인하고자 함이었다.

"아이구, 언니 신수가 훤하네. 제주가 좋은가 봐"

"응, 여기가 재밌어. 너도 제주로 와라. 같이 살자"

"그럴까? 매일 운동삼아 올레길 걷고…"

큰 이모는, 멀쩡한 집을 두고 갑자기 제주에 내려와 년세집에 산다는 언니가 한걱정이었는데 어머니의 높은 만족도에 은근히 구미마저 당기는 눈치셨다. 그러나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첫밤부터 어른들은 대만족이었다. 신제주에 사는 후배가, 침대에 누워서도 바다가 보이는 숙소를 공항 근처에서 찾아낸 덕에 금방 주무실 수 있었고  저 바다에 누워 행복한 물새로 아침을 맞으실 수 있었다. 아침밥은 생선회에 막걸리, 전날 저녁으로 마련한 것인데 비행기의 지나친 연착으로 하루 밀린 것이다. 새벽 5시에 일l어나 6시면 어김없이 아침식사를 하시는 새나라의 어른들 앞에 주변의 식당들은 너무 잠꾸러기였다. 해가 솟는 용두암에서 육지의 자식들에게 전화를 거셨다.

"어제 너무 늦어 도착전화를 못했다. 출근 중이냐? 아침밥은? 우리는 밥이 없어서 생선회 먹었어. 국을 못 끓여서 막걸리 마셨구"
"네에?"
수화기 너머 자식들이 황당해하는 기색에 어른들은 하하하하 웃음을 터뜨리셨다. 걱정마라, 우리는 아직 이렇게 건재한다 우렁찬 웃음으로 말하고 계셨다.

"암요, 관광의 특권은 낮술입죠"
내가 장단을 맞추자 어른들은 한술 더 뜨셨다.
"우린 눈 뜨면서 부터 마셨어"

"하하하하" 다시 웃음이 터졌다.

점심은 바닷가에서 식당을 하는 친구가 초대했다. 주인장인 친구가 갑자기 육지출장 가는 바람에 다른 친구가 대신 어른들을 다정하게 모셔주었다. 또다른 친구는 케이크를 사가지고 나타났다. 방문 축하 케익 커팅까지 하게 되니 어른들은 그야말로 황홀경이었다.

세째날, 서귀포 최고의 전망이라고 해도 시비 걸 사람 없을 곳에 집을 가진 친구가 마당을 빌려주었다. 잡초하나 없는 푸른 잔디밭과 발아래 쫙 펼쳐진 바다와 섬들을 배경으로 어른들은 포즈를 취하셨다. "오늘이 제일 젊은 날인 거 아시죠?" 한 마디에 어른들은 청춘시절의 기억을 되새기며 불편한 다리로 잔디밭에 앉기까지 하셨다.

"이 맛에 요즘 결혼하는 아이들이 웨딩촬영이라는 것을 하는구나"

찍어놓은 사진을 돌려보시며 어른들은 좋은 세상 보게 오래 산 게 고맙다고 하셨다.

"우리 애들 집에 이런 감귤 좀 부쳐주고 싶다

역시 부모의 마음은 좋은 것을 보면 자식이 걸린다. 딱 한번 일로 만난 적이 있는 사람의 농장을 찾아갔다. 그는 제주사람의 인심을 여한없이 보여주었다. 차와 다양한 종류의 먹을 것을 대접하고 특별히 값을 깍아준 것은 물론이요, 선물로 이것저것 얹어주었다. 형제분들의 여행이 다복해 보인다고 농장구경도 시켜주고 떠날 때는 내년에도 건강한 모습으로 뵙길 바란다며 귤 한 박스를 번쩍 차에 실어주었다.

"제주 사람들이 텃세가 심하다더니 그것도 아니네. 육지에서 온 것들이 못되게 굴어서 그랬나보다"

남원 큰엉입구의 정자 위에 둘러앉은 어른들은 여행객같지가 않았다. 집 근처에 나와 있는 동네 할망 하루방 같았다.
드디어 닥쳐온, 공항의 이별, 엄마의 행복을 확인하는 미션을 완수하고 돌아가는 어른들의 표정은 밝디 밝았다.  이모가 엄마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언니는 여기가 고향이네. 고향이 별거야?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데가 고향이지"

"맞아, 그러니까 늬들도 와"

황해도 해주에서 피난온 실향민 사남매는 이렇게 고향을 만들고 돌아갔다. 유목민시대라는 요즘, 어쩌면 이모의 말대로 고향은 '지역'이 아니라 '사람'인지 모른다. 고향이 되어 준 사람들이 정말 고마웠다. 나도 지금 누군가의 고향이 되고 있을까?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어졌다. 당신의 고향은 누구입니까? 당신은 누구의 고향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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