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리뷰] ‘할머니의 그림 수업’(김영사, 2023)
“날 추앙해요. 가득채워지게…”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 나왔던 대사로 채워져 본 적 없던 선흘마을의 여덞 할망들이 하나씩 붓질로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채워 그림으로 해방일지를 써내려 갔다고 해 읽게 된 ‘할머니의 그림수업’은 저자가 동백 동산으로 유명한 제주 선흘마을에 육지에서 온 할머니들의 그림 선생님으로 할머니들에게 처음 그림을 가르치게 된 순간부터 첫 학생인 강태옥 할머니를 비롯해 아흔살을 훌쩍 넘긴 조수용 할머니까지 각양각색의 여덞 할머니들이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 성장해 가는 과정이 담긴 책이다.
처음 그림을 배우신 강태옥 할머니를 비롯한 여덞 할망(할머니)들이 삐뚤삐뚤하지만 진심이 담겨 있는 그림을 배우면서 적은 일기와 우리의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야채 및 과일, 옷장 속 옷 등을 그려낸 그림 90여 점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친근하면서 어쩜 저렇게 예쁜 색을 쓰셨는지 놀라웠고, 얼마나 많은 정성을 쏟으셨는지 정겨운 그림이 책 속에서 묻어나와 사람의 향기가 솔솔 풍겨오는 듯 했다.
“할머니에게 소는 각별합니다. 할아버지와 소를 기를 때 사용하던 물건들이 아직도 소막을 채우고 있는데 절대로 없애진 않습니다. 이번에 소 그림을 그려보려고 10년 만에 서귀포의 이중섭미술관에 가서 이중섭이 그린 황소를 다시 보았고 그길로 아들의 축사에 가서 홍태옥, 고순자, 조수용 할머니와 이젤을 펴고 화폭에 소를 담기 시작하셨어요. 그리고 마침내 소막 입구에 커다란 소를 벽화로 새겨 넣으셨습니다. 그 이후 KBS <인간극장>에 할머니가 출연했는데 이중섭 소보다 우리 소(벽화)가 좋아요라는 멘트를 날리셔서 시청자들을 웃음 짓게 했죠.”
-p80 아꼬운 장면 중에서
책 표지를 장식한 아꼬운(귀엽다라는 뜻의 제주사투리) 열무를 그린 강희선 할머니는 소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평생 소와 함께 동거동락하며 살아와 그 누구보다 소를 잘 알 수밖에 없는 할머니의 근거 있는 자신감이자, 쇠테우리(소를 기르는 사람)를 했던 할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붓질로 그리며 먹고 살게 해준 소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든다.
“선흘 마을에서 만나 그림 수업을 하는 할머니들이 스스로를 해방시킨 공통의 도구는 ‘백지’라는 텅 빈 무대입니다. 그러므로 할머니라는 사피엔스가 해방 이후 나아가게 될 세계에 대한 기록 역시 백지라는 영역에서 매일매일 시작되지 않을까 짐작해 봅니다. 그림이라는 초월적 힘으로 할머니라는 사피엔스의 오늘을 기록하며, 우리는 더 나은 방향을 찾아 한 걸음씩 나아갈 겁니다. 다음 세대의 아이들이 걸어갈 길을 보다 안전하게 열어야 하니까요.”
-p190 나냥대로 중에서
제주의 4·3과 한국전쟁 등 크고 작은 제주의 대소사를 겪어내며 살아내기 위해 교육의 혜택을 못 받아 스스로를 해방 시킬 방법과 도구를 몰랐던 할망들이 그림 그리기를 통해 붓질로 꺼내지 못했던 자신들만의 시각으로 삶을 살아오며 가슴속에 알알이 박혀진 여러 다양한 감정들을 표현하며 그려낸 동화책 속 순수한 어린 아이가 그린 그림을 닮은 듯한 해방일지를 보고 있으니, 코 끝이 시큰하고 가슴이 뭉클해짐과 동시에 아이러니하게도 따스하고 정겨운 느낌을 받았다.
선한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라 하여 ‘선흘’이라는 이름이 붙은 제주 조천읍 선흘마을의 여덞 할망들의 붓질로 그려낸 그림 해방일지를 읽어보라 권하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