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벤포스타(Benposta)

스페인 서북부의 오렌세(Orense) 주에는 세계에서 가장 작은 국가가 있다. 그 국가의 공식적인 이름은 ‘벤포스타와 어린이 공화국’이다. 물론 이 나라가 유엔에 가입하거나 공식적인 국가로 세계적으로 인정된 것은 아니다. 1956년 한 신부와 열다섯명의 아이들로 시작된 이 공화국은 거의 반세기가 지나는 동안 스페인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지부(혹은 대사관)를 두고 있으며, 이웃 일본의 도쿄와 고베에도 지부가 있다.벤포스타가 우리의 관심을 끄는 이유는 공화국의 규모와 인구의 구성원 때문이다. 벤포스타 공화국의 인구는 2000년 현재 대략 1백50명 정도이며, 옛날 포도농장이었던 곳을 공화국의 영토로 하고 있다. 국민은 극소수의 어른을 제외하고는 전부 네 살부터 열다섯살 정도의 어린아이들이다. 이곳은 어린이들 스스로 자급자족하며, 자기들의 화폐를 만들어 사용하고, 자체 텔레비전 방송국을 운영하며 대통령과 시장, 장관 등을 두고 있다. 국경초소를 지키고 주유소를 운영하며 공장을 가동하고 방송을 만들고 내보내는 등 모든 것을 어린이들이 하고 있다. 이곳을 찾는 많은 관광객들-대부분 어른들이다-은 국경초소에서 어린이들에게 입국심사를 받고 은행에서 환전을 해야 하며 어린이들이 운영하는 수퍼마켓에서 필요한 물건을 구입한다. 어른들의 시각으로 보면 이건 숫제 어린이들의 놀이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겨우 150명의 어린이들이 모여서 사는 곳에서 대통령이며 시장이란 것은 아이들의 놀이로만 여겨질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모든 생활은 실제 국가에서 하는 것과 전혀 다름없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어른들의 사회보다 모든 것이 철저히 민주적으로 이루어지는 이상적 공동체에 근접해 있다는 점이 있을 뿐이다.처음 이 곳이 공동체 생활을 시작했을 때 이웃 사람들은 선량하고 정의감에 넘치는 신부 한 명이 아이들의 구호를 위하여 공동체를 만든 정도로만 생각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 곳은 세계 각지에서 인종과 종교를 초월하여 새로운 공동체적 이념과 교육철학을 연구하고 실험하는 모델로 자리잡게 되었다.이 곳이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교육의 현장으로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이 공동체를 창설한 실바신부의 몫이 크다. 그는 1956년 프랑코 파시스트 정권 시절 전쟁과 기아문제로 고통받는 고아 등을 모아 공동체를 만들었다. 그리고 오렌세 시를 중심으로 한 이웃지역에서 부모들의 동의를 얻어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기 위해 서커스단을 조직하여 전세계를 순회하면서 공연하고 그 수입으로 공동체를 꾸리면서, 아이들이 모든 것을 자율적으로 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공동체의 모든 운영을 아이들에게 맡겼다.벤포스타를 지탱하는 핵심정신은 조화와 존경이다. 특히 공화국의 구성원들간에 상호 조화를 이루려는 노력은 이곳의 핵심을 이룬다. 또한 모든 것을 자립적으로 이루려는 노력도 돋보인다. 그들은 공장을 운영하고 서커스단을 조직하여 국가의 재정을 확보한다. 공장을 운영하는데는 어른들의 힘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들은 어른을 고용(!)한다. 그래서 이 나라를 이루는 인구의 소수에 어른들이 포함되는 것이다. 이 곳의 어른들은 공동체를 건설한 실바신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아이들에게 고용된 기술자, 자원봉사자, 그리고 보모 등이다.과연 어떻게 이런 일들이 가능할까?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가장 중요한 것은 어린이들에 대한 어른들의 시각을 완전히 깨야만 가능해진다. 우리 어른들은 언제나 어린이들이 불완전한 존재이며 어른들의 보호와 지도를 받아야만 한다는 착각(!)을 갖고 있다. 모든 부모는 그들의 자녀에 대해 언제나 교육의 의무감을 느끼고 있다. 그것도 현 사회의 틀 속에서 어른들의 시각 속에서만.그러나 미국의 저명한 교육철학자이며 홈스쿨링의 이론과 구체적 실천에 지대한 역할을 한 존 홀트의 신념처럼 어린이들은 누구나 교육과 생존에 대한 본능적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 또 윌리엄 워즈워드가 표현했듯이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이다. 우리가 벤포스타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린이들의 능력과 그들의 세계에 대한 이해와 신뢰가 전제되지 않으면 안된다. 어른들의 편협한 시각을 깨지 않으면 벤포스타는 영원히 아이들의 장난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특히 우리의 교육현실은 어른들만이 아니라 어린이들조차 그렇게 만들고 있다. 규격화되고 정형화된 세계로 아이들을 몰아가고 있다. 아이들은 그저 학교와 학원을 오가며 지식을 주워담는 도구로 전락하고 있다. 많은 부모들이 이런 현실을 개탄하면서도 여전히 그 틀 속으로 자기 아이들을 내몰기만 할 뿐, 진정으로 아이들을 신뢰하고 아이들에게 자신들의 생활과 시간을 떠맡기지는 못하고 있다.벤포스타의 아이들은 자기 자신의 모든 것을 알아서 처리한다. 그리고 공동체를 위하여 자기를 억제하고 희생하는 것을 몸으로 느끼고 배운다. 그것은 오히려 역설적이게도 어른들의 개입이 없기 때문에 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 어른들이 언제면 아이들만큼 현명하게 세상을 보는 눈이 트일 수 있을지 안타까울 뿐이다.김원범/본지 발행·편집인제306호(2002년 3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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