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마을 촌로의 되돌아본 인생]윤세민/교육자

강정마을 큰 내는 예나 지금이나 맑은 물이 흐르고 있다. 서귀포시 상수운이 조성되므로 인해 유수량은 감소됐으나 수질은 여전히 일급수로 은어가 증명해 주고 있다. 큰 내는 옛날부터 우리 선인들의 정서를 대변해 준 곳이었다. 상수원 냇길이 소(紹)부터 장장 1키로 넘은 하천 변은 모두가 명소라 아기자기한 지명이 붙여지고 있었다.

찾아오는 풍류객들이 없으니 이런 명소들도 세월 따라 유수와 함께 소멸돼 가고 있다. 이는 곧 급격한 산업화 사회 구조로 우리 생활상이 변모돼 가면서 농경문화가 소멸돼 가는 현상이다.

지명에 얽힌 몇 가지만을 기술해 본다. 냇길이 소(四吉沼) 풍광은 신선이 내려 올만한 선인 가경이다. 우거진 숲 사이로 불어오는 미풍(微風), 가냘프게 흐르는 맑은 물줄기, 각종 새들의 울음소리, 기암절벽에 뿌리 막힌 나무들 네 가지 길조가 합성된 곳이라는 데서 붙여졌다고 한다.

풍류객들이 이 곳에 모여 앉아 지은 한 시가 있었다. 이 시구를 적어 두었는데 그 문서를 찾지 못해 아쉬운 생각이 든다. 지금은 통제구역이라 인적은 찾아볼 수 없고 원앙새 보금자리가 돼 버렸다.

지금 상수원 저수지 둑 쌓은 지점을 예전에는 도막이 꼴이라고 불러왔다. 바다로 방류되는 물을 막아 전답을 만들려고 시도했으나 당시 장비와 재료, 공법 자금 등이 열악해 큰물지면 유실돼버려 여러 사람들이 이곳에서 재산을 탕진되고 말았다. 이제는 그 자리에 거대한 세멘트 둑이 구축돼 선인들의 대망이 현실화 됐다.

은어 떼는 유월이 돼 가면 물살을 타 수원지로 비상한다. 내려오다 보면 남동지 소(沼)가 있다. 남씨가 자주 찾는 은어 낚시터라는 데서 붙여진 것이다. 동지(同知)란 직함이 없는 노인 존칭이다. 동지중추부사하면 다르다. 이어 진 소가 수영장 마냥 펼쳐있다. 길다(長)의 변형음에서 진소라 한다.

지금 완고하게 놓여있는 다리의 변천사를 보면 그 시대에 살아온 선인들의 발자취를 가늠할 수 있다. 1940년대까지는 징검다리, 1950년대 들어 수레바퀴 시대가 되면서 현대식 공법에 의한 교각 다리가 놓여졌다. 이민들은 정기 버스노선을 요구해 왔으나 성사되지 않았다가 한참 뒤인 1990년대 들어 버스노선이 됐다.

큰 물질 때의 유수량을 고려하지 않고 교각기둥 하나 줄였다가 다리 목이 유실되는 이변이 발생했다. 지금 다리는 1990년대 후반에 하중량을 고려해 완벽하게 놓인 다리다.

하류에는 울림은어 통이 있다. 은어생태는 가을에 산란해 바다에서 부화돼 봄철에 담수로 올라오는 어종이라 바닷물 만조 때는 냇물 수면과 별로 차이가 없어 이 때에 물줄기 따라 치어가 올라온다.

누군가 앞장서 잔 돌멩이로 유도수로를 만들고 낙차지점에는 얕은 통을 만들어 물살에 밀려 떨어지는 치어를 잡는 것을 올림은어 잡는다고 한다. 만조 때만 올라오니 때맞춰 사라들은 소풍 겸사해 맷부리 변에 모여든다. 가두어 올린 치어는 모든 사람들에게 고루 나누어 주는것이 통상관례로 돼 있었다.

빈대같이 매일 빈손으로 갈 수 없어 소주 한 병들고 가는 사람도 있었다. 은어 안주에 소주잔을 나누던 시대는 옛말이 되고 말았다. 제사가 있어 왔다면 더 얹어주기도 했다. 공동체와 나눔의 정신 화합의 장이었다.

지금은 은어 개체 감소로 금지돼 있다. 일제강점기 1945년까지는 6월 1일을 기해 제주도사(島司)가 와해금 선언과 동시에 은어 맛보고 가는 관례가 있었다.

윤공렬씨(1911-1963)가 1937년 강정 광제의숙 교사 재직시 적은 일기장에 6월에 들어 ‘일본인 시학(視學)이 학사지도 방문. 큰 냇가에서 일배(一杯)했다’고 적혀있다. 은어 대접이면 만사가 ok. 은어 안주로 마시는 술맛이 일품이라는 소문을 듣고 관리들의 출장이 자자졌다.

마을 이장은 접대용 술과 초장을 항시 준비해 둔다. 이장이 손님을 모시고 냇가에 가면 은어 걸리던 젊은이들은 알아채 통에 잡아둔 은어를 갖다드린다. 안주는 공짜로 얻는다. 이장 권위를 세워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관에 걸어진 사건들은 이장이 도맡아 해결해 준다.

일본사람들이 최고 진미로 여기는 명품이 있었다. 은어를 숯불 열기로 익히는 구이다. 맷뿌리 모래판에 숯불을 피워 적쇠를 높게 매달려 그 상판에 은어를 얹혀 논다. 열도가 높으면 타버려 상품성이 없어 버리게 된다. 그러므로 미열로 노랗게 읽혀 내면 보기가 좋았다. 입에 넣으면 바싹 바싹해 진미는 덜하면서도 고소한 향미가 난다.

일본사람들은 정초에 정종 한잔에 이 아유야끼(은어 구이) 먹으면 행운이 온다며 선호했다. 일본국 여행증을 받으려면 조건이 까다로워 빈번히 반려된다. 은어 토산품은 일본사람들에게는 속성 즉효 뇌물로 통용돼 왔다. 명품제조 장인이 1940년에 작고하니 그 명맥은 끊기고 말았다.

강정은 해변마을이라 제사 갱(羹)국에는 날 해어를 넣었다. 연일 파도가 일어 돛단 고기잡이배도 묶이고 단물깍(담수 하류)에 그물 칠도 못할 때 제삿날이 다가왔다. 마른 우럭 갱을 올려도 신위는 노하지 않겠지만 불효막심해 상심할 때가 있었다. 이때는 큰 내로 나가 은어 열 마리만 사면 세 마리는 구워 올리고 나머지는 갱국을 만들어 올리다. 그래서 큰 내 은어는 효자 제수 감이라 해 왔다.

지금은 여름철 피서객들이 모여들어 인파가 넘쳐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큰 내가 지역 상징으로 강정천이라 불려져 유명해 졌으나 옛 정서 탓인지 촌 노들은 여전히 큰 내라 한다. 불과 100미터 사이에 흐르는 아끈내도 예나 지금이나 변함 없이 은어가 서식하고 있으며 풍광이 아름답다. 천혜의 자연을 잘 보전하여 후손들에게 물려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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