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마을촌로의 되돌아본 인생> 교육자 윤세민

강정마을 섯 동네 어르신들은 여름철만 되면 섯동네 아왜 낭 목 숲에 모여 앉아 세상사를 논하며 회포를 푼다. 필자 윤세민(1930년생)은 어렸을 적에 또래들은 물놀이로 하루를 보내는데 유독 어른들이 아기자기한 이야기를 듣는 것이 재미있어 놀이보다 즐거웠다.

그래서 주저하지 않고 방청객(?)이 대 어른들 틈에 끼어 앉았다. “애들이 어른들 말하는 자리에 오면 못써. 집에가라”하지 않고 너그럽게 감싸주시던 어르신들 생각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미래를 예언한 한 노인은 나를 지목해 저 애들은 하늘로 날아다니고 바다 물밑으로 다니는 세상이 된다. 새벽 큰 내 하류에 가면 일본 소리가 들린다.

좌중들은 이 엉뚱한 발언에 또 허풍쟁이 잠꼬대 나팔 분다며 쏘아냈다. 이 예언을 듣는 순간 몽롱세계에 헤매 데는 것만 같았다. 지금 현실이 그렇게 된 것이다. 미래학을 탐독하지 않는 촌 노가 예언을 했다니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 노인이 오더니 대뜸 하는 말이 “집안에 산태걸이 자손이 태어났으니 내 죽어버렸으면 폐가 망신되는 꼴을 보지 않을 것” 탄식해 댔다.

자초지종 묻지 않고 화제는 산태걸이 멍석말이로 이어져갔다. 그때 어른들 말씀이 너무나 인상적이라 오랫동안 잊지 않고 있다가 지금에야 기술하게 된 것이다. 마을 단위로 불량배 폭력배에 가하던 이 산태걸이 멍석말이는 조선시대 풍헌(風憲)관장하에 자치적으로 시행해 왔던 체벌제이다. 풍헌 직은 향소직(鄕所職)의 하나로 이(里)의 일을 맡아 하는데 사법권이 있어 죄인을 다스리는 권한 뿐 아니라 고소 고발 분쟁같은 사건을 처리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관직이었다고 구전한다. 법보다 인간의 도리를 생명과 같이 여겨 살아온 선인들은 동네에 부녀자를 농락하고 약자에 생트집하여 술 볼라 먹는 추태, 식칼을 휘두르며 공갈 협박을 일삼는 보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불량배가 있었다.

친근 가족들이 나서 달래보기도 하고 선도해 보나 날로 포악해져 속수무책이었다. 이렇다보면 주민들은 ‘불안해서 못 살겠다’, ‘저놈을 마을 밖으로 추방시켜라’, ‘젊은이는 보고만 있느냐’ 여론이 고조돼 풍헌은 어차피 자치적으로 산태걸이와 멍석말이 체벌로 강제 구금토록 하명하게 된다. 요즘 법리로 보면 모두가 위법이지만 관행에 의해 집행 되는 것이 아니라 소수가 나서 변논 해보지만 다수의 여론이라 별 방책이 없었다. 산태란 나무로 만든 기구인데 세우면 사다리로 쓰이고 또 가운데 물건을 얹혀 두 사람이 앞뒤에서 양손에 잡아들면 운반용 기구로 쓰이는 농가에서는 요긴한 기구였다.

공론은 돌았지만 불량배를 누가 붙잡아오겠는가. 후일 보복이 두려와 나서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방관해두면 불량배 행패가 더 심해져 하루라도 기를 펴고 살 수 없다. 이때 담대한 젊은이가 주동이 돼 의혈단과 다름없는 의(義)로 맺은 벗들을 규합해 동네사람들이 볼 수 있는 사거리 길목에 붙잡아온다. 너의 불량한 행패로 우리 동네는 정신적으로 많은 고통을 받고 있으며 불안해서 살 수 없다. 그러니 너는 산태걸이를 하겠다. 구두 선고한다. 자성하는 기미는 보이지 않고 폭언으로 맞서며 발광한다. 산태 위에 눕혀 팔과 다리를 큰 대자 모양으로 펴 노끈으로 산태 목에 묶어 거꾸로 세워 놨으니 장사도 곧 기력이 소진되는 중벌이었다.

생명에 지장이 없을 정도로 세워두었다 풀어주고 만다. 친족이나 가족들은 보기가 민망스럽고 한편으로는 동네 사람들 보기에 체면 없어 현장에 오지 않았다가 풀어줬다는 소문이 들리면 달려와 “동네사람들 원망하지 말고 네가 저지른 행동거지에 대해 반성하라” 개중에는 타일러도 내색하지 않고 더 앙심을 품어 식칼을 들고 다니며 위협 주는 통에 산태걸이 역기능이 컸다고 한다. 멍석말이도 산태걸이와 같은 체벌방법이다. 멍석에 불량배를 눕혀 김밥 말듯이 말아 거꾸로 세워 자백을 받는 공개재판이었다. 일제강점기1 들어 면 단위로 일본순사 주재소가 설치돼 민생치안을 관장하면서 마을 자체로 불량배에 가하던 체벌방법도 없어지게 된 것이다.

1940년대까지만 해도 밤에 애가 울어대면 어머니는 “울면 순검(일본인 순사) 심어간다” 이 말에 울음을 멈추었다고 한다. 오죽했으면 오순도순 살아가는 이웃 형제간에 이런 체벌제가 있었는지 알만하다. 모두가 답답해서 궁여지책으로 마음 편하게 잘 살아 보자는 최선책으로 선택한 것이다. 요즘 관에서 주도하며 권장하는 “범죄 없는 마을” 행복한 마을 만들기와 조금도 다를 바 없다. 그래서 옛 선인들은 자체로 마을 정화에 나선 것이다. 그 여운은 1950년대까지도 산태걸이 불명예는 당대 지워지지 않고 우리 곁에 나돌고 있었다. 가문의 법도를 어긴 불효막심한 행동거지를 보면 산태걸이 자손이 태어났다며 탄식해 왔다.

저작권자 © 서귀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