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마을 촌로의 되돌아 본 인생]윤세민 / 원로교육자

일본 아베총리는 전후 70년 담화에서 우리나라는 지난 전쟁에서의 행동에 대해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표명해 왔다라는 교묘한 사죄를 했다. 그들이 저지른 만행을 역사는 어떻게 처벌해야 할 것인가. 잊어져 가고 있는 것 같아 애처로운 생각이 든다.

일제강점기 친일 반민족 행위 등을 거론하면 으레 공출시대가 떠오른다. 태평양전쟁이 막다른 1943년부터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소위 마른나무에 물짜듯이 백성들을 들볶아 댔으니 이 시기를 누나 할 것 없이 공출시대라 했다.

공출이란 국가의 수요에 따라 곡식이나 기물을 의무적으로 정부에 매도하는 것이라 대의명분이 있는데도 선인들은 얼마나 야속하고 통탄했기에 탄광징용을 탄광공출, 비행장 건설에 나가는 부역도 비행장 공출이라 했을까.

이런 인명경시 풍조는 악랄한 일본 제국주의가 저지른 만행이라 지금도 통한이 풀리지 않는다. 에누리 없는 보리공출 량을 묶고 나면 고팡에는 어느새 보릿고개 바람이 살랑거려 어머니들은 울먹인다.

총알이 많아야 전쟁이 승리한다며 놋쇠기물 할당량이 나오면 으레 이장은 종갓집을 찾아다니며 애걸복걸하니 그 인정에 못 이겨 내주다보면 조상 대대로 전해오는 제기는 반 조각의 수난을 맞게 됐다.

횟수가 거듭될수록 목표량이 미달되니 황국신민 다 돼버린 조선인 관리가 나와 헌납을 강요했으나 끝내는 뱃심으로 대항하기 시작했다. 가택수색까지 해서라도 놋쇠기물만은 강탈 할 것이라는 풍문이 돌아 대나무 밭에 파묻어 대응해 왔다. 동네 집 숟가락 수정까지 다 알고 있는 마을 이장이나 동수(洞首)들을 앞세워 가호를 방문하는 통에 뜬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우리 집에는 조상대대로 물려 내려오는 청동화로가 있었다. 이 화로는 종조부님의 일본 청진 간 왕래하는 화객선원으로 일하면서 박봉을 털어 유기점에서 매입해 아버지(필자의 증조부님) 환갑 효자품으로 어렵사리 보내온 것이라 애장품이었다.

온 마을에 소문난 가보라 일본관리가 사욕을 채우려고 강탈하려는 기색이 유기 공출제가 나면서부터 들려왔다. 이를 대비해 별 궁리를 다해봐도 묘책이 없어 상심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 친일 관리가 와 헌납하라는 불호령이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아버지는 바락 화가나 그래 내주마. 어서 갖고 가 총알 만들어 미국 병정 쏘아라 화로를 둘러메고 올레목 먹돌 차면담에 내려쳤다. 받침대가 떨어져 나가고 화로 천 바위가 망가져 볼품없이 망가져 버렸다.

그래도 들고 나가는 악랄한 친일배를 지켜보며 애국충정만 알지 인정머리 없는 놈이라며 두고보자 앙심이 솟구쳤다. 이를 빗대어 선인들은 갈치가 갈치 골랭이(꼬리) 끊어 먹는다고 말해 온 것 같다.

며칠 후 815광복을 맞게 됐다. 면사무소 수집 창고에서 고물상에 그리고 불품없는 유기로 환생했을 것이다. 공출은 이것뿐이 아니었다.

군용 통조림용으로 돼지공출이 있었다. 당시에는 모든 가호에 통시가 있어 돼지를 사육하고 있었다. 용도는 다양했다. 혼례, 상례와 같은 큰일에는 돼지고기가 접대음식 주종이라 잔치돼지, 대소상 돼지, 노부모를 위한 돼지 등 여러 가지 꼬리표가 달려있었다.

우리집에도 할머니 소기 제찬(祭粲)감으로 키우고 있었다. 불시에 공출관리가 나올까봐 항시 면사무소에 근무하고 있던 친구가 사전에 알려줘 돼지를 안전지대로 대피시켜 위기를 모면한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내일에 공출담당서기가 강정마을에 나간다는 극비연락이 전화통신 시설이 없으니 인편에 온다. 교통편은 중문면사무소에서 도보로 와야 하니 시간 여유는 충분했다.

벼가 무성하게 자란 논밭에 내다버리면 돼지는 물통과 진흙에 둥글 수 있으니 최고 휴양지에서 피서 나온 셈이라 꿀꿀대지 않는다. 노출되지 않은 최고의 대피방법이었다. 이런 소문이 나돌아 강정마을에서는 혹시나 해서 논밭에 임자 모른 돼지 휴양지가 돼 버렸다.

담당자는 집에 들어서면 우선 통시를 본다. 돗 도구리가 마르지 않아 먹이 흔적이 남아있다. 돼지 똥도 오늘 싼 똥이다. 증거물을 들이대며 압박한다. 이에 대응하느라 변명을 해 댄다. 외방 큰일 집에 팔려갔다, 추렴돼지로 방금 팔아버렸다 이래저래 언쟁하다 물러서는 담당자는 일본 물이 덜 든 면사무소 서기라 했다.

소기 날짜는 다가오는데 한시도 안심할 수 없어 우영 밭 구석 눌 틈에 피신시켜 은폐해 두었으나 돼지 본능이 발산돼 꿀꿀되니 여지없이 발각되고 말았다. 공출하라, 못하겠다 언쟁이 벌어졌다. 충성심이 강한 조선인 관리였다.

법보다 더 강한 사도의 양심을 지키면서 살아오신 아버지는 특히 권력 행세하는 관리 앞에는 물러서지 않는 처의불회(處義不回)기백이 강했다. 호락호락 응하지 않으니 분통이 터져 우리 식구들을 응시해 눈을 부릅뜨는 그 험상한 꼴이 지금도 선하다.

이 험악한 분위기를 해소하려고 어머니께서는 난간에 걸터앉은 관리에게 통사정했으나 허사였다. 일본사람 다 돼버린 면서기는 앙심을 품고 하는 말이 배일(排日)사상이 짙은 요시찰인물이다라는 말에 아버지는 와락 화가 나 너는 조상도 없는가. 효심도 없는 어느 나라 백성이냐 대성일갈로 설전이 벌어졌으나 승패 없이 끝났다. 두고 보자는 식으로 자리를 떠나고 말았다.

울분이 채 가라앉기 전에 815 광복을 맞았다. 한치 앞을 모르고 살아가는 것이 세상사다. 해방되면서 무법천지가 돼 버렸다. 북해도 징용 갔다 돌아온 사람들 분풀이한다고 찾아 나섰으나 이미 자기가 저지른 행위에 대해 자책감을 느껴 도피해버려 살다보니 잊고 말았다. 그러나 한때 친일행각을 부려 위세가 도도했던 사람들의 말로를, 그리고 그 후세들의 녹녹치 않은 삶을 지켜보면서 적선은 바로 자손을 위한 보험과 다름없다는 어른들의 훈언이 새삼 가슴에 사무친다.

우리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반듯하게 살아갈 수는 없다. 법 이전에 인간의 도리를 모르고 사는 것이 애처롭다. 일제강점기에 옛 선인들이 어떤 시련을 안고 살아왔는지 그 시절에 나를 한번쯤 대입해 고통스러워해 볼일이다.

나눔과 배려의 맘으로 살아가자꾸나. 누구가 누구의 잘못을 탓하겠는가. 모두가 나라 잃은 민족의 설움이었다.

저작권자 © 서귀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