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한숙희의 [만남]

"네, 이번 토요일에 평화비를 세워요."

그가 핸드폰을 열어 저장된 사진을 보여준다.

군위안부로 끌려갔던 소녀가 앉아 있고 그 옆에 빈 의자가 나란히 놓여있다. 소녀의 발밑에는 흩어진 붉은 동백꽃잎들, 그 모든 것을 제주의 상징 검은 흙이 받치고 있는  조각상이 눈 앞에 펼쳐진다.

"이제 이 의자에 사람들이 앉아서 함께 사진을 찍는 포토존이 될 거예요. 평화비가 세워질 노형동 방일리 공원은 한라대학교와 탐라도서관, 노형중학교 등이 곁에 있어서 소녀가 외롭지 않을 거예요. 그저 바라보고 지나가는 평화비가 아니라 곁에 앉아서 이런 역사가 있었음을 깨닫고 지금 이 분들과 우리가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체험하게 될 거라서 딱 좋은 위치예요"

어찌나 담담하게 말을 하는지 25세라는 나이가 믿지질 않았다. 어느 지역에서든 무엇을 위한 기념비 하나를 세우는 일은 장난 아니게 힘든 일이다.

마음은 있으되 엄두가 안 나서 세워지지 못하고 있는 기념비도 적지 않을 것이다. 일단 추진이 시작되어도 공정과정은 지난하다. 위원회를 꾸리고 회의를 열고 실무팀이 가동되고 후원자를 모으고 짧지 않은 세월이 간다.

그런데 6명의 여대생이 1년만에, 그것도 정부도 껄끄러워하는 군위안부 평화비를, 제주라는 쉽지 않은 지역에서, 떡하니 세운다는 것은 보통일이 아니다. 이런 대단한 일을 해놓고 조금도 들뜨지 않다니, 설마 실감을 못하고 있는 건가? 아니면 진행과정이 너무 순탄했나?

"부지문제로 행정부서에 갔을 때 울컥했어요. 아예 저희 이야기를 들어주려 하지 않고 군위안부 문제는 자신들의 일이 아닌 거예요. 우리 부서 관할이 아니라고 이리 저리 떠미는 거예요. 취업이 어려운 시기에 학생이면 제 앞가림이 우선 아니냐, 왜 그런 일에 나서느냐, 얼마 못갈 거다, 이런 거였어요"

이런 말을 하면서도 여전히 차분하고 담담하다. 혹여 눈물이 비칠까 했지만 아니었다.

"함께 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올 3월에 평화나비 콘써트를 했는데 제대 아라뮤즈홀 400석이 다 찼어요. 그 행사를 위해 서포터즈를 모집했는데 70명이 모였어요. 이런 저희 활동에 대한 언론보도가 나가면서 시에서도 먼저 부지제의를 해왔구요."

"돈은?"

"김서경, 김운성 예술가 두 분이 재능기부로 만들어주셨어요. 그래도 3300만원이 필요한데 11월말까지 모금액이 1300만원인 거예요. 기자들이 맨날 전화를 해서 19일에 건립 행사 가능하냐고 물어요. 예정대로 한다고 했어요. 일단 세운 다음에 꾸준히 모금하면 되니까요.그런데 건립발표 기자회견을 하고 3주만에 2천만원이 모인 거예요. 저희도 깜짝 놀랐어요."

이 대목에서 나는 흥분했는데 그는 살짝 웃기만 할 뿐이다. 그리고는 차분하게 덧붙인다.

"오늘 평화비 담돌에 새길 이름을 정리했는데 개인이 600명, 단체가 40개예요"

그는 교사가 될 사람이었다. 어려운 가정환경으로 2년간 휴학이 불가피하게 되었을 때, 어차피 주어진 거라면 제대로 자기시간을 삼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일본에 워킹 홀리데이를 갔다.

"일본어를 몰라 가다가나 히라가나 정도만 알고 갔는데 현장에서 그것도 엄청 큰 도움이 되는 거예요. 아, 뭐든 조금씩 천천히 꾸준히 해나가면 다 되게 되어 있구나, 그걸 알았어요"

아, 그제야 나도 알았다. 이렇게 애벌레로 닦은 단단한 기본기가 내 눈앞에 내공있는 평화나비(군위안부 관련활동을 하는 청년모임)로 나타나 있는 것이구나.

서포터즈 70명은 제주도의 모든 고등학교 졸업식장을 찾아가 발품을 판 결과였고, 사람들의 참여는 알아야 알릴 수 있다고 친구들과 합숙하며 밤새워 공부했기에 끌어낸 결실이었고, 언론의 관심은 성실하고 꾸준한 활동으로 입증된 진정성이 물어온 박씨였다.

"제가 한 것이라기보다 꾸준히 하다보니 모두의 힘이 합쳐지면서 평화비가 세워지는 거지요"

내가 한다는 욕심이 없는 순수, 이건 겸손과는 다른 차원의 것이다. 그녀는 이뻤다. 순수해서 이뻤다.

저작권자 © 서귀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