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에게 듣는다 - 素農 오문복 선생

 

역사문화의 향기, 素農 오문복 선생에게 듣고 정리한다. 한학자이며 향토사학자인 서예가 오문복 선생은 잊혀져 가는 제주의 민속자료 정리와 고서 발굴, 번역 작업 등 향토사 연구에 바쁘시다.  素菴 현중화 선생의 제자로서, 서귀포소묵회 일원으로서 후학양성 등에 나서고 계시다. <편집자 주>

 

원래 대소인하마비(大小人下馬碑)가 있던 정확한 장소는 향교의 입학문(大成門) 앞쪽에 세워졌던 홍살문(서원이나 향교, 능 등의 앞에 설치했던 문으로 문짝과 지붕 없이 붉은 색 주칠을 했다. 양쪽 지주석에 기둥을 세우고 그 상부 가로대 위에는 살대가 박힌다. 홍살문부터는 청정하고 신령스런 공간이라는 상징성을 갖는다. 홍살문 앞에는 대개 하마비를 세웠다. 아무리 지체 높은 사람도 홍살문 앞에서부터는 말에서 내려 걸어 들어가라는 뜻이다. 현재 삼성혈 앞쪽에도 남아 있다) 옆이었다 한다.

해방전 제주향교배치도 (제주유교발전사 자료).

 해방전 향교배치도(제주특별자치도향교재단 刊, 『濟州儒敎發展史』 참조)를 살펴보면 대성전 위쪽에 공부자 동상과 그 오른편으로 계성사(啓聖祠) 와 전사청이 세워져 있다. 계성사는 중국 5성(五聖)의 아버지를 모시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역사기록을 찾아보면 나라에서는 1739년(영조 15)에 모든 주와 큰 고을 향교마다 계성사를 세울 것을 명령하고 20년 뒤인 1759년에 사액(賜額)했다고 전한다. 제주향교 계성사는 1854년(철종5)에서야 목사 목인배(睦人培)가 창건해 김용징(金龍徵)이 편액을 지은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대성전과 명륜당 사이에 제기고와 악기고가 놓여 있고, 명륜당과 동재 동편으로는 수선당과 서고(책고) 선비식당 등이 있었다.
 

 현재 성읍민속마을에 남아있는 정의향교는 정의현과 대정현이 설치(1416년, 태종16)된 이후인 1420년(세종2)에 창건된 것으로 보지만 이미 1408년(태종8) 홍로현(洪爐縣)에 시건되었던 것으로 추정한다.(정의향교측) 홍로현은 1300년(고려 충렬왕26)부터 1416년까지 약 116년 동안 서귀포시 지역에 존재했던 속현이다. 홍로현 현사(縣司) 위치는 현재 서귀포시 서홍동 150번지 일대로 속칭 대궐터라는 지명이 전하는 곳이다. 이 대궐터에서는 기와편과 주춧돌이 남아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탐라기년耽羅紀年』(심재 김석익 편저, 오문복 감수) 기록을 살피면, 卷之一 경자(1300). 충렬왕26년(원 대덕4년)에 동서도현(東西道縣)을 설치한 것으로 확인된다. 김석익이 풀이하길, 〔현촌(縣村)은 귀일(貴日), 고내(高內), 애월(涯月), 곽지(郭支), 귀덕(歸德), 명월(明月), 신촌(新村), 함덕(咸德), 김녕(金寧), 호촌(狐村), 홍로(烘爐), 예래(猊來), 산방(山房), 차귀(遮歸) 등지이다. 대촌(大村)에는 호장(戶長) 3인과 성상(城上) 1인을 두고, 중촌(中村)에는 호장 2인을 두고, 소촌(小村)에는 호장 1인을 두었다. 전해오는 말에 신라가 성주를 책봉할 때 촌(村)을 두고, 고려 의종 때 또 나누어 현(縣)을 두고, 원종 때 삼별초를 평정해서는 탐라 온 고을을 합쳤는데, 이때 다시 현촌을 두었다 하니 이치가 혹 그렇지만 서로 현촌이 된 연대는 알 수 없다〕고 기록했다.
 

 정의현과 대정현이 설치된 것은 1416년 5월 도 안무사 오식(吳湜)과 판관 장합(張合)이 임금께 한라산 남쪽이 땅이 넓어 본읍(제주를 뜻함)과의 거리가 멀어 공사의 불편함을 아뢴 데에서 비롯되었다. 본읍에 동도의 신촌함덕김녕현과 서도의 귀일고내애월곽지귀덕명월현을 소속시키고, 한라산 남쪽 동도 땅인 토산호촌홍로현으로 한 읍을 삼고, 서도의 땅인 예래차귀를 한 읍으로 삼아 현감을 두어 다스리게 할 것을 계청했던 것이다. 왕명에 의해 그해 7월 정의(旌義)와 대정(大靜) 두 현 설치가 이뤄졌다. 이때 읍치를 홍로에 두었다가 즉시 수산평(현 성산읍 고성리)로 옮겼다. 옥터가 불리하다는 이유였다고 전한다. <태종실록>에도 죄인 두 명이 옥사하자 예조참의로 옮겨 벼슬살이하던 오식을 심문하려 하니 왕이 대신을 옥에 가둘 수 없다는 기록이 나오는 것으로 볼 때 읍성을 옮긴 이유를 짐작하게 한다.


 정의향교는 1423년(세종5) 정간(鄭幹) 안무사 때 정의현청을 고성리에서 진사리(현재 성읍리)로 이설할 때 이건되었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처음에는 현성 서문 밖(속칭 향교골)에 세웠다. 당시 대성전만 건립해 오성위만 봉안했다. 1738년(영조14) 현감 나억령이 현성 서문 안(현 대성전 북쪽)으로 옮겨 짓고 명륜당과 동서재를 지음으로써 향교로서 면모를 갖췄다. 1779년(정조3)에 황최언 목사 때에 학전과 교토를 받고 1792년(정조16)에 현감 허식(許湜)은 교궁의 남쪽, 현재의 명륜당 뒤편에 정의서당을 건립했다. 1809년(순조9)에는 여철영 현감이 향교를 다시 화원동으로 옮겨 짓는 중에 객사에 불이 나 모든 문적이 소실되면서 그 책임으로 여 현감은 사퇴하고 말았다. 뒤를 이은 현감 노상회가 부임해 이설 사업을 마쳤고, 1849년(헌종15)에 이르러 유림들의 뜻을 모아 현재 위치로 향교를 옮겨 세우게 되었다. 1892년(고종39)에 김문주 현감이 향교를 중수하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고, 1909년(융희3) 장용견 현감 때에 중수 공사가 이뤄졌다.
 

 정리:안창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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