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은 시인의 風景

섬 하면 대개 휴양과 낙원 이미지를 지닌다. 뭉게구름 피어오르는 해변과 푸른 파도, 하얀 모래사장 같은 풍경이 우선 떠오르기 때문이다. 가도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수평선, 암초로 둘러싸인 섬의 모습은 고립과 난파의 이미지를 지니기도 한다.


여기에 상상이 개입되면 섬은 한층 더 다양한 이미지로 변신한다.


지상의 열매들은 손만 뻗으면 닿는 곳에, 빛 속에 열려 있었다. 입으로 깨물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프랑스의 유명한 철학가이자 작가인 장 그르니에가 산문집「섬」에서 말한 것처럼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곳에 섬은 지상의 열매처럼 열려있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 정현종「섬」
 
 정현종 시인은 고독으로 점철된 인간 본래의 개연성(蓋然性)을 섬이라는 단 두 줄의 시로 표현했다. 이때의 섬은 사람들 사이를 이어주는 관계를 의미하기도 하고 인간 존재의 근원을 표방하는 상징이기도 하다. 그 관계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도피처이기도 하고 희구하는 낙원이기도 하다. 섬이 지닌 광대무변(廣大無邊)의 상징성을 잘 나타낸 촌철살인의 표현이다.


 섬(island)의 어원은 isolation이다. 고립, 분리, 격리, 외로운 상태를 뜻하는 말이다. 나 또한, 화려한 도시의 환경 속에서 물과 기름처럼 겉돌며 고독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은 생리적으로 이러한 섬의 운명을 지녔기 때문인지 모른다. 행정상, 제주도(濟州道) 본도(本島)는 섬에서 제외되었음에도 사람들이 여전히 제주를 하나의 섬으로 인식하는 것 역시 과거, 역사적, 지리적으로 고립무원이던 때가 태반이었음을 기억하기 때문인지 모른다.
 

 고독을 일치감치 몸 안에 들여 놓은 것은 수평선 너머를 동경하던 중학생 무렵이다. 섬을 둘러싼 바다가 창살 없는 감옥처럼 느껴졌다 저마다의 일생에는, 특히 그 일생이 동터 오르는 여명기에는 모든 것을 결정짓는 한 순간이 있다 고 한 장 그르니에의 말처럼 그때 나는 소통되지 않는 한 공간을 마음속에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내 몸속에 서천꽃밭이 들어있다. 이름도 낯선 도환생꽃, 웃음웃을꽃, 싸움싸울꽃들로 만발하다. 깨어진 화분에 몇 포기의 그늘을 옮겨 심는 나는 그 꽃밭을 가꾸는 꽃 감관
 
 꽃 울음 받아 적는 저물녘이면 새가 날아가는 서쪽 방향에 대해 붉다라고 쓴다. 산담 아래 흩어진 깃털에 대해 쓴다.
 
 불에 탄 돌덩이가 기어 다니고 느닷없는 바람 몰아치는 곳, 언제부터 섬이었는지 활화산을 삼킨 내가 그 꽃밭의 배후여서 웅크린 섬의 둘레에 어두워가는 바다가 들어앉았다.
 
 새를 꺼내보렴 너를 볼 수 있을거야, 새를 새로 꺼내는 파도 속에서 나는 나로부터 가장 가까운 새를 만진다. 어둠이 무거워 날지 못하는 새
 
 천국과 지옥으로 나누어지는 거기서부터 내 몸이 파도친다. 나의 神은 그곳에 가장 큰 저승을 들여 놓았다.
 - 졸시「고독에 대하여」전문
 
 서천꽃밭은 제주도 무가(巫歌)에서 서역 어딘가에 있다고 믿는 꽃밭이다. 여기에 피는 꽃을 죽은 사람에게 뿌리면, 살살꽃은 살을, 뼈살꽃은 뼈를, 도환생꽃은 영혼을 되살아나게 해준다고 한다. 나에게 있어 서천꽃밭은 몸속에 뿌리 내린 고독의 이름이다. 그 꽃밭에 핀 꽃에 따라 마음의 향방이 삶과 죽음을 경험한다. 불에 탄 돌덩이가 기어 다니고 느닷없는 바람 몰아치는 고독한 마음의 배경엔 고향 제주가 육체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고독은 집단적 가치에서 소외된 형태를 지닌다. 다행히도 지금은 고독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시대이다. 고독을 자아성찰과 발전의 기회로 삼는 경우도 많아졌다. 고독한 삶이라는 낭만적인 판타지를 흉내내는 고독은 기실 무용지물이다. 제대로 된 고독 사용법이랄까, 고독과 친구가 되는 기적을 이룬다면 고독은 분명 그에게 시간의 주도권을 쥐어줄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고독이라는 저승 속에서 천국과 지옥의 갈림길을 맞는다. 어느 쪽으로 갈지, 선택은 각자의 몫일 것이다.


 제주에 내려와 홀로 있는 날이 많아졌다.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다른 사람이 아닌 나와 만나는 시간이 많아졌다. 이제 나는 새를 새로 꺼내는 파도 속에서 기꺼이 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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