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다원을 찾아 농민 허상종(81), 안행자(76) 두 어른과 대화를 나눴다. 두 분은 일심동체였다. 두 분을 만나고 온 것이 아니라 마치 한 분을 만나고 온 것과 같은 기분이 든다. 질문에 답을 얻으면서도 두분께 동시에 얻었다. 답이 부족하다 싶으면 서로 보완해주셨다. 각각의 질문에 대해 주도적으로 말씀해주신 어른의 이름을 괄호 안에 넣어 답변 앞에 표시했다. 그러나 실은 구분이 무의미하다. 두 어른은 農心으로 묶인 하나의 목소리, 하나의 혼이었다.>

 

차밭이 아름답다. 서귀다원에서 녹차를 재배하는 두 어른의 생활이 궁금하다. 
(안행자 어른) 대략 4월 1일부터 보름 동안 수제차를 따고 이후에는 기계로 수확한다. 그 둘도 차맛에 큰 차이가 있다. 수제차는 서귀다원에서 직접 덖고 기계로 대량 수확한 차는 봉성으로 가서 덖는다. 수제차를 덖을 때는 열기 속에서 땀범벅이 된다. 4월에는 한 30명씩 일꾼이 필요하다. 기계 작업을 하면 귤농사에 비해 일하기 편하다. 무엇보다 일꾼 구하기가 수월하다. 감귤농사 할 때는 일꾼 구하는 것이 가장 큰 일이었다. 여름은 풀과의 전쟁이다. 매일 풀을 베야 한다. 4월에는 일꾼이 필요하다. 5월부터는 둘이서만 일을 한다. 아침 여섯시부터 열시까지 일하고, 한숨 자거나 쉬고 네 시부터 다시 두 시간 일한다. 저녁엔 연속극을 보고 인터넷으로 주문온 것이 있나 살핀다. 녹차 농사가 귤농사에 비하면 육체적으로는 편하다. 그래서 아직 손에서 일을 놓지 않고 있다. 


서귀다원의 역사는 어떻게 시작됐나? 
(안행자 어른) 40년동안 감귤밭을 했다. 일본 가고시마로 여행(허상종 어른 칠순 기념여행)을 갔다가 녹차밭에 반해 2만평에 이르는 유기농 녹차밭을 일구게 되었다. 감귤이 과잉생산된다고 폐원을 종용하던 시기에 감귤 과수원을 폐원하기로 했다. 퇴직금을 퍼붓고 녹차밭을 일구기 시작했다. 감귤을 재배한 경험이 있어 차나무를 극조생 조생 만생 등 골고루 식재했다. 아무래도 돌아가면서 찻잎을 수확할 수 있어 능률적이다. 가고시마 여행 후, 부부가 일심동체로 감귤 과수원을 폐원하고 녹차밭을 일구기로 결정했다. 제주명차를 만들겠다는 마음을 가졌다. 농약과 화학비료를 쓰지 않는 유기농으로 하고 있는 이유다. 나이 70에 그런 결정을 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녹차밭을 하기로 했을 때 자식들이 "편한 노후를 지내시지 왜 일을 저지르세요"라며 걱정을 많이 했다. 하지만 지금은 "두 분의 깊은 뜻을 이제야 알겠다"고 말한다. 

감귤 과수원을 폐원하고 생소한 차밭을 일구는 데 얼마나 고생했을지 짐작하기도 어렵다. 
(허상종 어른) 초기에는 정말 고생을 많이 했다. 2005년 딱 젓가락 같은 차나무를 삽목하고 관리하며 기다려야 했다. 2009년까지는 수확을 보지 못했다. 4년 동안 차나무 종노릇을 했달까.(웃음) 4년 동안 벌이가 없다보니 녹차를 수확할 때까지 마이너스 통장을 쓰는 등 고생을 많이 했다. 도에서는 감귤 과수원 폐원을 종용하고는 폐원한 과수원들에 별다른 도움을 주지 않았다. 인건비와 가공비로 큰돈이 들어간다. 판로개척 등에 있어 관으로부터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했다. 오설록 같은 기업으로부터 차 재배 교육 같은 것도 받을 수 없었다. 관과 대기업들이 같은 지역 농민들과 함께 커나갈 마음이 없는 것 같다. 


도내 차 재배 농가 현황은? 
(안행자 어른) 녹차 재배 농가가 한때 70 농가 가량 되던 때도 있다. 현재는 녹차 농가들이 계속 폐원하고 있다. 녹차 농가에 대한 도의 지원이 없다. 감귤 과수원을 폐원하고 녹차를 재배해온 농가들이 녹차를 포기하고 감귤을 다시 시작하는 경우도 있다. 현재 녹차를 재배하는 곳은 30~40농가 밖에 되지 않는다. 판로개척 등 도의 지원이 없으니 점점 더 줄어드는 추세다. 이제 와 귤 농사로 다시 넘어가는 농가들도 있지만 귤농사 하는 농민들은 또 요새 얼마나 불안에 시달리는 처지인가. 값싼 외국 과일들이 들어오면서 귤이 제일 하급 과일 취급받고 있다. 게다가 기후가 변화하면서 완도는 물론 강원도에서까지 귤을 재배한다고 한다. 제주 농민이 정말 어렵다. 농민이 살아야 제주가 사는데 그런 인식 자체가 없는 것 같다. 

차밭 경계에 돌담과 조그만 돌탑들이 정겹다. 그냥 돌이 아니다. 돌 하나 들어 올리는 데 허리 한 번 굽혀야 한다. 이곳저곳에서 부부의 땀과 손길이 느껴진다. 
(허상종 어른) 돌 하나 올릴 때마다 동서남북으로 살피게 된다. 어울리게 잘 올려졌는지. 돌 한번 올릴 때마다 몇 번씩 봐야 한다. 손이 안 간 곳이 없다. 아내가 25세 되던 해, 그러니까 결혼하고 6년이 되던 해에 아내가 나서서 밭을 샀다. 한라산 중턱의 밭을 산다하니 사람들이 미쳤다고들 했다. 산중턱에서 감귤 농사가 되겠냐고. 하지만 벌어놓은 돈이 없어서 시에 가까운 밭을 살 수 없었다. 당시 아랫밭은 평당 1,500원 하고, 여기는 평당 300원 했다. 돈은 없지만 욕심은 있어서 넓은 밭이 좋았다.(웃음) 걱정과 달리 농사도 잘됐다. 일조량이 좋아서 귤 당도가 높았다. 그렇게 시작해서 전부 52년째 농사를 짓고 있는 밭이다. 반 백년이 넘었다. 

그렇게 일궈온 다원을 살피는 마음은 어떤지? 
(안행자 어른) 녹차아이스크림을 팔라는 둥, 녹차 국수를 하라는 둥, 일꾼을 구해 카페를 열라는 둥 조언을 많이 듣는다. 하지만 이제 와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장사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농부가 장사를 하면 장사를 잘 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자유롭게 차밭을 구경하고 녹차를 사고 싶은 사람들은 녹차를 사고 간다. 더 욕심 부리지 않고 용돈을 버는 정도로 족하다. 어릴 적부터 차를 마셔서 건강하다. 우리 두 부부의 손으로 일군 녹차밭의 경치를 바라보는 것이 좋다. 후회 없다. 농부로서 긍지와 보람을 느낀다. 땅을 지켰기 때문이다. 땀 흘려 생산한 차를 팔면서 지금과 같은 삶을 사는 것, 그것이 앞으로의 소원이다. 

도와 기업의 홀대 속에서 서귀다원을 키워온 비법은? 
(허상종 어른) 끊임없이 영농일지를 써왔다. 재배 기술을 전수해주는 곳이 없어서 영농일지를 통해 내년의 농사를 대비했다. 일기를 써온 버릇이 되어서다. 聰明不如鈍筆(총명불여둔필: 흐린 글씨가 기억력보다 낫다는 의미)이라는 말을 스스로 오래 새겨왔다. 일기들이 누전으로 불이나면서 사라졌지만, 지금껏 쓰고 있는 영농일지는 우리집 보물이자 가보다. 농사란 것이 농부의 마음대로 되는 것도 아니다. 하늘의 도움도 필요하다. 금년도 시작하면서 세계적인 다원으로 재도약 하자, 입소문으로 서귀다원의 가치를 담는다, 미래의 고객창출-유기농, 답은 현장에 있다는 등의 글귀를 써두었다. 글귀를 볼 때마다 매번 마음에 새기고 있다. 

땅에 대한 애착과 관심이 남다르다. 
(안행자 어른) 왜 땅을 안 파냐는 소리를 들은 적도 있다. 우리는 땅을 팔면 갈 데가 없어서 못 팔았다. 귤농사를 짓던 어떤 농민이 땅을 팔았더니 남은 게 없다고 하소연했다. 농민에게는 땅이 전부다.  자식들에게 아버지와 어머니의 혼과 정성이 든 이 다원을 천년동안 지킬 수 있게 해달라고 당부했다. 서울에 있는 자식들은 돌아올 곳이 있어서 좋다고 말한다. 결국 땅을 지킨 것만큼 후손들에게 도움 되는 것은 없다. 땅 팔고 사업을 했다고 생각해보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꼭 물어봐야 할 걸 아직 안 물어봤다. 서귀다원의 차 맛은 어떤지? 
(안행자 어른) 일조량이 좋은 한라산 중턱에서 맑디 맑은 제주 지하수를 머금고 자란 유기농 차다. 무엇을 더 말할 것이 있을까?(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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