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원기자 탐사]이령경(일본 릿쿄대학 겸임교수, 정치학)

1977년 3월 24일 중앙정보부는 강우규, 강용규, 김추백, 이오생, 김성기, 이근만 씨를 포함 총 11명을 자유통일협회 간첩단으로 발표했고 이듬해 2월 대법원은 이들을 간첩으로 최종 확정했다. 이로부터 38년이 지난 2016년 6월 9일 대법원 3부(주심 김신 대법관)는 故 강우규 씨를 포함한 6명이 청구한 재심 재판에서 무죄를 판결했다. 이미 고인이 된 강우규, 강용규, 김추백씨 가족과 생존해 있는 이오생, 김성기, 이근만씨는 누명을 벗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 기뻐한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일본에서 <강우규 씨를 구원하는 모임>을 만들어 활동해 온 일본인들이다.

사업차 한국에 간 남편이 두 달이나 소식이 없다가 북한 간첩단의 주모자라는 보도를 접하고 강우규씨의 아내 강화옥씨는 망연자실했다. 그때 그녀를 위로하고 지원한 것이 구원회였다. <재일한국인 정치범을 지원하는 모임 전국회의>의 사무국장 요시마츠 시게루(吉松繁) 목사가 신문보도를 보고 다음날 집으로 찾아왔다. 1976년 6월에 결성된 전국회의는 박정희 군사독재 하 유학, 가족방문, 사업차 한국을 방문했다가 간첩으로 몰린 이들의 구원운동을 전국적으로 펼치고 있었다. 가족들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요시마츠 목사는 강우규 씨가 살던 에도가와구의 교회와 지역의 노동조합연합단체에 도움을 요청했고 이들이 <강우규씨를 구원하는 모임>의 주축이 되었다.

당시 30살이던 사토 야스코(佐藤康子)씨는 일제시대 오사카 철공소에서 사고를 당해 왼쪽 다리를 잃고도 곤경에 빠진 재일조선인들을 구하기 위해 노력하던 분이 간첩일리가 없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해 구원운동을 시작했다. 그녀는 체포의 위험 때문에 한국에 가지 못하는 가족을 대신해 3차례나 재판 방청과 면회를 갔었다. 강화옥씨는 지금도 사토씨를 딸처럼 의지한다.

혼자 사는 강화옥씨를 이틀에 한 번씩 방문해 보살펴 주고 있는 고이즈미 요시히데(小泉義秀)씨와 준코(純子)씨는 당시 22살의 노동조합원이었다. 두 사람에게 있어 강우규 사건은 한국 독재정권의 인권탄압만이 아니라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패전 후에도 이어진 일본 정부의 재일조선인 차별 정책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문제였다. 그렇기 때문에 주체적으로 열심히 구원회 활동을 했다. 두 사람은 나중에 부부가 되었다.

구원회는 먼저 강우규씨의 간첩혐의를 뒤집는 알리바이나 물적 증거를 찾아내어 역 앞 선전과 서명활동을 매주 펼쳤고 집회도 열었다. 사형이 확정된 1978년부터는 사형집행을 막아야 된다는 절실함에 단식투쟁을 벌였고 수차례 일본 정부에 인권구제를 요청하는 시민들의 서명을 모아 전달했다. 에도가와구 구장을 비롯해 국회의원 160명 이상이 서명에 동참했다. 강화옥씨는 전국을 돌며 남편의 무죄를 호소했고, 딸 강국희씨는 다른 간첩조작사건의 피해 가족들과 함께 UN까지 가서 아버지의 억울함과 사형집행 저지를 호소했다.

이 덕분에 1982년 강우규씨는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일본에서 일어난 필사적인 구원운동이 사형 집행을 막았다. 감형 뒤에는 고령에 고문 후유증으로 위독했던 강우규씨의 긴급 입원과 석방을 위한 활동을 이어갔다. 1989년 강우규씨가 가석방되어 무사히 일본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 뒤 구원회는 마지막 소식지 19호를 발행했다. 소식지와 각종 구원운동 자료들은 재심재판에 큰 힘이 되었다. 구원회가 뿌린 씨가 재심 한국의 피해자들의 무죄로 이어지는 결실도 가져왔다.

재심 과정을 지켜보면서 고이즈미씨 부부와 사토씨는 자신들의 청춘을 바친 구원운동을 되돌아 보며 강화옥씨가 남긴 발언, 강연 내용을 정리하고 있다. 비록 강우규씨는 같이 할 수 없지만, 이들 세 사람의 마지막 바람은 96살의 강화옥씨와 함께 강우규, 강화옥씨의 고향 제주도를 방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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