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레이터 한정희가 만난 문화예술인] '서예가 한천(寒泉) 양상철'

'한천 양상철'은 서예를 대중에게 사랑받고 시대에 맞는 예술로 만들기 위해 서예에 회화를 접목, 융복합시킴으로써 서예술의 현대화를 추구하고 있다.

서예가 한천(寒泉) 양상철

△ 소암 현중화 선생님께 서예를 배우셨다고요.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으시다면?
제가 중학생이던 당시에는 화선지가 귀해서 갱지에 글을 썼는데, 그것도 귀하니까 신문지에 썼어요. 일주일 단위로 신문지에 연습하고서 갱지에 쓴 작품을 교무실에 가서 선생님께 검사 받았지요. 한번은 연습을 많이 해서 일주일 공부를 이틀만에 끝낸 후 자랑스럽게 갱지에 써서 보여드렸어요.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저더러 다짜고짜 손을 내밀라고 하시더니 대나무뿌리 회초리로 호되게 손바닥을 후려치는 거예요. “맞을 자격이 있는 놈이 맞는 거여!”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제깐엔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갑작스럽게 맞으니까 좀 억울하더군요. 이후에 생각해보니까 “때리려고 때린 게 아니니, 서둘지 말라”는 가르침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아무리 잘 썼다고 생각되더라도 무조건 신문지에 써서 보여드렸죠.
또 기억에 남는 일은, 2학년 때 선생님께 교실에 게시할 급훈을 써달라고 부탁드렸더니 <설향(雪香)>이라고 써주셨어요. '눈 설'에 '향기로울 향'자거든요. "눈에 냄새가 없는데, 왜 향기가 날까."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눈이라는 것은 깨끗함을 의미하지 않나요? 어린 생각에도 아마 ‘눈처럼 깨끗하고 향기로우라’는 뜻으로 써주셨을 거라, 짐작했었죠.(웃음)

한천(寒泉) 양상철, '침묵의 숲'

△ 서예가 대중에게 멀어지고 있다는 얘기를 하는데요.

아시다시피 요즘 서예의 보급도 줄어들고 있습니다. 컴퓨터나 핸드폰의 자판을 이용하다보니 요즘 젊은 사람들이 붓을 잡아 볼 기회도 없고, 서예를 배우려 하지도 않아요. 어른들에게는 서예가 과거의 향수로 선호되고 있지만, 즉흥적이고 인내심이 부족한 젊은 사람들은 접근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게다가 서예교육이 지나치게 인내를 강요하고 인성과 예절과 윤리, 도덕에 초점을 맞춰 수련하듯 하니 크게 흥미를 끌지 못한다고 봐요. 서예가 인간의 심성을 다스리는 것은 맞지만 일단 재미가 있어야 하거든요. 서예 역시 예술의 한 장르로 인식되어야 할 필요도 있고요. 서예가 대중에게 파고들려면 시대성을 갖추는 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곧 예술성을 확보하는 문제라고나 할까요? 이것은 물론 '서예가 미래를 담보하는 생명력이 있는가.' 하는 것과 같은 질문이기도 할 겁니다. 의사전달의 수단으로서 서예의 실용성은 이제 소멸되었으니 예술성을 드러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한천(寒泉) 양상철, '金文集字-大人君子'

△ 서예에서 직관력과 상상력은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요?
  미술 작품 감상에는 직관력이 요구됩니다. 문자를 매개로 하는 서예는 지‧필‧묵만으로 직관력과 상상력을 동원하기가 어려워요. 서예의 본질은 문장을 읽고 쓰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필선(筆線)에 있는 것이지요. 서예의 직관력을 높이는 길은 선(線)의 특성과 다양한 재료를 이용하는데 있습니다. 서양의 선은 윤곽인 반면에 서예의 선은 일회성, 순간성‧즉발성‧속도감으로 작가의 성정을 표출합니다. 붓은 원추형으로, 붓질은 방향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게 되죠. 먹의 농담과 붓의 속도에 따라서도 다르고요. 다양한 붓질이 천차만별이거든요.

한천(寒泉) 양상철, '갑골무제'

또 지‧필‧묵만으로 읽는 문자를 쓰는 시대는 이제 지났습니다. 다양한 재료들을 활용해 문자의 조형과 공간을 운영하고 작품을 시각화하는 것이 필요해졌습니다. 역사를 거슬러보면 구석기시대의 사실적 동굴벽화가 신석기시대의 암각에서는 단순형태의 선 구조로 바뀌는 것을 확인할 수 있어요. 의사를 전달하는 것이 곧 부호라고 할 수 있는데, 그림이 이제 부호로 바뀐 것이죠. 그 부호가 약속이 되고 단순화되어 문자가 되는 것입니다. '서화동원(書畵同源)이라는 말이 있지요. '글씨와 그림의 근원이 같다.'는 말이거든요. 이제 서예가 과거와 현재를 넘어 미래를 관통하려면 지금의 문화와 시대의 미감에 맞게끔 '보는 서예'로 바뀌어져야 합니다. 선의 특성을 극대화하면서 다양한 표현을 위해 재료를 바꾸고 시대를 초월해 문자문명의 근원을 파헤쳐서 표현영역을 확대하는 것도 감상의 직관력을 높여주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 전통서예와 융복합서예술에 대해 말씀해 주시죠.
서예 역사에서 오래된 제재는 한자에 있습니다. 한자의 원류는 거북이 등이나 짐승의 뼈에 새겨놓은 은나라 갑골문입니다. 5,000여자가 발견되고 2,000여자가 해독되고 있어요. 여기에서 상형을 유추할 수 있는 것들이 많죠. 문자 자체가 추상적이지만 상형성에 근원하고 있지요.

자연을 그대로 표현했지만 문자화되면서 자연의 형상을 잃어버린 것인데, 바로 구상에서 시작해서 추상까지 온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천(寒泉) 양상철, '바람을 기다리는 붕새'

예를 들어 '붕(鵬)'이라는 것은 인간의 거대한 꿈을 얘기할 때 은유되는 붕새를 말하죠. <바람을 기다리는 붕새>는 갑골문의 ‘새 조(鳥)'자에 ‘날개 우(羽)'자를 붙여서 갑골에 없는 ‘붕(鵬)’이라 추상화시켜 놓았습니다. 문자지만 전형적인 추상화로 보입니다. 그래서 저는 상형성이 있는 갑골문이나 은·주시대의 도상문자들에 영감을 받아서 작업을 하고 있어요. 전통적으로 문자만을 추구해 대중과 단절되어 가는 현상을 뛰어넘어서 현대적인 미감으로 섞는 방법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虎, 꽃사슴이 사랑한 호랑이

재료에 관해서는 건축을 공부해서 그런지 그 영향을 받기도 했는데요. 제주석 돌가루, 석고, 쇠, 나무 등 여러 가지를 활용합니다. 석고를 발라 쓰기도 하고요. 문자를 풀어서 이미지화해 내용에 적합한 재료와 회화적 기법을 이용하기도 하죠. 우연의 효과를 표현하기도 하는데, <虎, 꽃사슴이 사랑한 호랑이>는 '호랑이 호(虎)' 자를 양각하고 필선이 강조된 꽃사슴 품 안에 민화의 호랑이를 그렸어요. 문자도의 새로운 형식이 이렇게도 만들어지는 것이죠.

한천(寒泉) 양상철, '한라의 봄'

저는 문자를 읽을 수 있도록 작품으로 완성하지 않습니다. 다만 작품 안에서 문자와 함께 이미지로 상상력을 부여해 직관력을 갖고 통찰할 수 있도록 합니다.

<중화(中龢>는 붓질에 대한 에너지를 보여주는 작품인데요. 갑골문자의 ‘중(中)’자로 희로애락이 배제되어 있는 상태인데, 그 절도가 가장 맞을 때는 ‘화(和)’로서, '중화'라는 것은 '통달한다'는 뜻이죠.

전체적으로 서예와 서양의 재료, 기법, 표현방법 등을 융합해 작업을 완성하는 방법이 제가 주로 하는 작업과정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 앞으로의 계획은요?
오는 11월에 KBS제주방송총국 전시실에서 아홉9번째 개인전을 준비하고 있어요. 전통서예와 융복합서예술 작품을 동시에 관람 할 수 있는 전시입니다.
융복합서예술 작품을 시작하게 된 것이 벌써 15년 전입니다. 이제는 좀 더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 싶은데요.

지금까지 하고 있는 작품들이 정적이고 회화적인 요소와 성격이 강했다면, 앞으로는 동적인 키네틱아트와 접목한 작품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객원기자 한정희(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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