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객 끊이지 않는 위미리 '애기동백숲'

위미리 '애기동백숲'. 요즘 관광객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다.

얼마 전부터 위미2리 일주도로 동쪽에 렌트카들이 양 길가를 가득 채웠다. 날마다 오전부터 오후 늦게까지 벌어지는 일이다. 어릴 적부터 자주 지나던 길이지만 차들이 항시 몰려드는 게 심상치 않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처럼 가까이 사는 사람들도 모르는 사이, 뭔가 재미있는 일들이 벌어지는 모양이다.

그렇게 사람들이 모여들게 된 사연은 역시 우리 몰래 다녀간 블로거의 사진 한 컷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어떤 화사한 빛깔과 향기가 인터넷과 사회관계망서비스, 젊은이들의 입소문을 타고 전국 구석구석에 전달되었을 터.

그 소문을 타고 전국에서 많은 관광객들이 다녀간 후에야 소문이 내 귀에 들어왔다. 오래전 유행했던 ‘번지 없는 주막’처럼, 간판도 이름도 대문도 없는 가칭 ‘애기동백숲’에 대한 얘기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위미리는 원래부터 동백나무로 유명한 마을이다. 그 출발은 1858년생인 현병춘 할머니가 바람을 막고 토양유실을 방지하기 위해 밭담 둘레로 조성했다는 동백나무숲에 있다.

현병춘 할머니가 조성한 동백나무숲이다. 수령이 150년에 이르러, 제주도가 지방문화재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겨울철 짙은 녹색의 윤기를 발하고 눈내리는 날 홀로 붉은 꽃을 피우는 동백으로 삶터를 에워 쌀 생각을 하셨다니, 할머니의 미적 감각이 탁월하다 하겠다.

위미리가 동백나무로 유명해진 사연

물자가 귀했던 시절, 사람들은 동백기름을 식용유나 화장품으로 사용했다. 아주머니들이 전을 지질 때도, 외출하려 머리카락에 윤기를 낼 때도 동백기름을 사용했다. 동백나무는 남자들에게 장난감을 제공했다. 아이들은 동백나무 가지로 새총을, 어른들은 윷가락을 만들어 놀았다.

그러는 사이, 현병춘 할머니가 조성한 동백나무 숲은 수령이 150년에 이르렀다. 수많은 기억을 간직한 주민들은 동백나무숲을 통해 따뜻한 고향을 느낀다.

위미마을은 시인을 많이 배출한 고장이다. 고정국(중앙일보), 오승철(동아일보), 고명호(현대시조), 안정업(문예사조) 등 신춘문예를 통해 동단한 시인만도 수두룩하다. 이들이 발간한 시집에도 동백나무에 대한 작품이 어김없이 들어있다.

사름두 죽을 때민 저치룩헌 모슴이카(사람도 임종 때면 저만한 마음일까)

질더레 꽃 지와둥 지만 저들단 보름소리(길 위에 꽃 지우고 밤새 울던 바람소리)

털어졍 사름만 바레는 돔박고장 어떵허쿠(떨어져 사람만 보는 동백꽃을 어쩌랴)

소개한 시는 고정국 시인의 사투리 시조 ‘저 마당을 어떵 씰쿠’라는 작품이다. 표준어 해석본도 시인이 손수 지었다. 동백꽃이 떨어지는 모습에서 죽은 이와 이별하는 슬픔을 연상케 한다.

'애기동백숲'은 현병춘 할머니의 손자가 조성했다. 최근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최근 관광객들로부터 각광받고 있는 동백나무 숲은 현병춘 할머니가 조성한 숲에서 북쪽 가까운 곳에 있다. 현병춘 할머니의 손자인 오덕성씨가 조성했다.

동백꽃은 수많은 문학을 낳고

현병춘 할머니가 심은 것이 동백나무라면, 손자는 애기동백을 심었다. 애기동백은 동백에 비해 꽃이 일찍 그리고 화려하게 핀다. 떨어질 때, 동백꽃은 통으로 떨어지는데 반해, 애기동백꽃은 꽃잎이 따로 떨어지는 차이가 있다.

애기동백 열매는 동백의 것보다 크기가 작다. 과거 현 할머니 시절에는 겨울철 바람을 막고 열매를 통해 기름을 얻는 등의 실용성에, 그 손자는 화려한 꽃이 전해주는 미적 효용에 주목했다. 할머니에서 손자로 이어지는 동백나무 사랑 덕분에 마을은 미적으로 훨씬 풍요로워졌다. 문학은 그 위에 피어난 선물이다.

그 풍요로운 빛깔과 향기를 찾아 설레는 가슴을 안고 수많은 선남선녀들이 몰려들고 있다. 그 사실을 이제야 알았으니, 참 무디게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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