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성중의 문화엿보기<27>

뉴질랜드의 산파3월 19일은 필자에게 가장 행복한날 중 하나였다. 왜냐하면 그 날로부터 아버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객지에서 아들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걱정을 많이 했었지만, 뉴질랜드는 임산부와 육아에 대한 복지제도가 잘 돼있어서 많은 도움이 됐다. 그 중 하나가 한국에 없는 산파제도다. 우리에게는 산파라 하면 현대적 의료시설이 없던 시절에 애를 받아주던 아주머니로 알고 있는데 여기서는 산부인과에서 없어서는 안돼는 가장 중요한 일을 맡고 있다. 얘기하자면 한국 산부인과의 간호사와 친정 어머니의 역할뿐만 아니라 때로는 의사의 역할까지 포괄적으로 대행해주면서 가장 임산부와 시간을 많이 보내주는 책임자가 뉴질랜드의 산파(midwife)다. 우리 부부가 처음 산파를 만났을 때, 약 한시간 반에 걸쳐 산부인과동의 시설과 의료기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해주었다. 한국에서 5분 이상 간호사나 의사와 얘기를 나눠 본적 없어서 나중에는 괜히 미안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우리 부부가 떠나기 전에 자기 개인 전화번호와 호출기 번호까지 주면서 궁금한 것이 있을 때마다 연락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필자가 뉴질랜드의 산파에 대해 놀란 것은 아내가 출산할 때였다. 초산이라 진통이 이틀동안 계속됐지만 산파는 밤낮 관계없이 지속적으로 출산의 진행 상태를 진단했다. 능숙한 솜씨로 의료기계를 다루면서 태아와 산모의 진행상황을 진단하는 것이 마치 산부인과의사가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새벽에 본격적인 출산이 시작되었을 때, 산부인과동의 모든 당직 산파들이 다같이 담당의사를 도우면서 새 생명이 태어나는 중요한 일이 안전하게 마무리가 되었다. 밤을 꼬박 새면서까지 도와준 담당산파는 애가 첫 젖을 받아먹을 수 있게 도와주고 아내의 건강상태를 확인한 후 그날 오후가 되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밤을 새서 힘들겠다는 필자의 말에 늘상 하는 일이라 익숙해졌다며 웃으면서 집으로 가는 산파를 보면서 직업의식에 앞선 봉사정신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후에도 산파의 방문은 아내가 병원에 있는 동안에도 계속되었고,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차로 한시간이 넘어 걸리는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우리 가정을 방문해 우리 부부를 도와주었다. 이런 산파제도가 있었기에 한국과 시설과 조건이 다른 환경 속에서도 무사히 출산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제256호(2001년 3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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