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 있는 풍경] 강석관 시인의 '봄의 성적표'

벚꽃구름이 섬을 점령하니 봄이 절정이다.
제주시 애월읍 광령리 벚꽃길. 우리 가족이 살던 주변이다.
제주시 삼도일동 전농로 벚꽃길. 홍윤애의 무덤이 있던 곳이다.
대흘리 마을 연못이 꽃잎으로 덮였다.
가시리 녹산로. 유채꽃과 벚꽃이 서로 어우러져 장관을 이룬다.
남원읍 하례2리 양마단지 입구 벚꽃길.

감색 바닷바람 머금은 출발신호에/서귀포가 분주하더니

하룻밤 새 한라산이 정복당했다는 소식이다

제일 먼저 목련의 화려함에 넋 잃은/개나리가 정겹게 스타트라인을 밟는데

5 일 뒤 진달래가 뒤쫓으며/익숙하게 북상을 시작한다

다음은 벚꽃차례/개나리 출발 뒤 열흘만의 일/ 꽃구름으로 산정을 점령한다

온 산 온 들 덧씌우며/꽃들은 도미노처럼 북상을 거듭/저마다 깃발을 휘두른다

보름도 더 걸리는 장거리 경주지만/길은 언제나 화려하고 언제나 새로왔다

새벽마다 이슬 뿌리며/그리움을 한 움큼 씩 쏟아낸

관악산 입구 라스트라인에는/서귀포에서 서울까지의/승전보가 걸려 있다

개나리 시속 1.27킬로미터/진달래 시속 1.35킬로미터 /벚꽃 시속 1.20킬로미터

꽃들은 해마다 경주를 벌이지만/성적표의 북상기록은 해마다 그대로다

-강석관 시인의 ‘봄의 성적표’

봄이 되면 목력, 개나리, 진달래가 차례로 서귀포에 상륙한다. 시인은 봄의 전령들이 서귀포에서 한반도를 향해 북상하는 것을 화려한 장거리 경주에 비유했다. 마지막 주자인 벚꽃이 지나갔으니 이젠 완연한 봄이다.

 

위미 일주도로 변에 가로수로 심은 벚나무가 꽃을 활짝 피웠다. 내가 초등학교 입학한 후 심은 나무로 기억하는데, 40년쯤 지난 고목이 되어 거리에 온통 꽃비를 뿌리고 있다.

고등학교 2학년 수학여행 때 처음으로 제주를 벗어났다. 처음 제주를 벗어났는데 바람도 많이 불고, 식수에서 냄새도 많이 나 꽤 고생했던 걸로 기억한다. 여행에서 돌아오는 날, 밤에 도착했는데 마침 보슬비가 내렸다. 칙칙한 몸으로 무거운 가방을 들고 돌아오는 데 피곤이 말이 아니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날이 화창하게 개었을 때, 흐늘거리는 벚꽃과 그 틈으로 보이는 파란 하늘의 감동이란 고등학생의 언어로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다. 지금처럼 나무가 크지 않을 때지만, 처음으로 벚꽃 황홀경에 취해봤다.

두 번째로 벚꽃에 취한 건 대학 다닐 때 진해 군항제에서다. 진해는 도시 전체가 아름드리 벚나무 공원이었다. 꽃잎 휘날리는 나무그늘 아래 포장마차에서 폼 잡고 소주마시다 막차를 놓친 기억에 지금도 웃음이 난다.

세 번째 기억은 첫애가 태어날 무렵에 만난 벚꽃이다. 2001년 1월에 애월읍 광령리 임대아파트로 이사를 갔는데, 그해 3월말에 딸이 태어났다. 무수천 입구에서 광령초등학교를 지나 고성리로 이어지는 중산간 도로변에 흐드러지게 피어난 꽃잎의 감동은 딸의 태어남과 더불어 농도 깊게 남았다.

광령리에서 3년을 살고 이사 간 곳이 제주시 서사라였다. 우연하게도 이사 가고 얼마 없어 아들이 태어났는데, 그때도 3월 말이었다. 마침 전농로와 가까운 곳이라 봄이 되면 우리 가족은 어김없이 벚꽃의 축복을 듬뿍 받고 살았다.

가는 곳마다 벚꽃과 인연을 맺으며 살다 20여년 만에 다시 고향에 터를 잡게 됐다. 나도 변했고 주변의 많은 것들도 변했는데 봄이 되면 벚꽃은 어김없이 잔치를 열어준다. 올해도 연분홍 벚꽃구름이 절정을 이뤘다. 흐드러지게 피어난 꽃잎이 바람까지 불러들였다. 바람에 떨어지는 꽃잎이 눈이 되어 날리니, 이제 봄이 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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