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한숙희의 자연 & 사람 그리고 문화 - 9

서귀포 전경.

세계 환경문제를 의논하는 국제대회에서 일이다. 한 분과에서 본격적인 토의에 들어가기 전에 참석자들끼리 자기소개를 하게 되었다. 어느 나라에서 온 아무개다, 하는 일은 무엇이고 이런저런 이유로 여기 참석하게 되었다, 대개가 이런 형식으로 통과의례처럼 자기소개를 이어가던 중, 어떤 여자의 차례가 되었다.

그녀는 자기가 사는 마을의 풍광부터 소개했다. 앞에는 어떤 산이 있고 근처에는 어떤 강이 흐르고 봄여름가을겨울 마을에는 어떤 꽃이 피고 지며 농작물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그 다음에는 자신의 조상들을 소개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 어머니와 아버지뿐만 아니라 자신이 직접 보진 못했어도 전해들은 선대들에 대한 이야기까지. 그리고는 지금 현재 자신과 더불어 살고 있는 이웃들을 소개했다. 옆집에는 누가 사는데 그는 어떤 사람이고, 앞집에는 누가 사는데 그와는 어떤 추억이 있고.

30분이 넘는 긴 소개를 마무리하며 그녀가 말했다.

“이 속에 존재하는 것이 바로 저입니다”

그녀의 자기소개는 사람들의 마음에 그녀를 깊이 각인시켰다. 저 여자가 누구야,? 응, 어떻게 생긴 마을에서 어떤 어떤 사람들과 이러저러하게 살고 있는 사람이야. 다른 사람들은 물건의 상표처럼, 이름과 나이와 직업과 국적으로 구분되었으나 그녀만큼은 살아있는 실체로서 사람들에게 ‘소개’되었다. 그리고 그녀의 존재는 그 국제 대회가 끝나 모두가 제 나라로 돌아간 다음에도 사람들의 가슴에 담겨 전 세계에 소개되었다. 그리하여 그 대회에 참석하지도 않은 내 귀에까지 들어왔다. 모름지기 자기소개라 하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줍니다”

어느 아파트 광고 카피이지만 맞는 말 같다. 애국가에는 동해물과 백두산이 나온다. 우리나라 학교의 교가들 중에도 산 이름이나 강 이름이 들어있는 예가 적지 않다. 그리고 그 산과 강의 정기가 이 학교를 다닌 학생들 속에 스며든다는 내용이 빠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 산과 강 이름만으로 그 학교의 위치가 대충 추정되고, 그 학교를 다닌 사람들의 성격이 어떠할지가 미루어 짐작되는 것이다.

산이 있는 고을에서는 의리있고 덕이 높은 사람이 나온다고 한다. 물이 있는 곳에서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나온다고 한다. 강원도 옥수수, 해남 배추처럼 사람의 품성도 자연지형에 따라 특화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소개에 자연이 들어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자, 그럼 자기 소개를 슬슬 시작해 볼까요?

“한라산이 등 뒤에서 어머니 품처럼 품어주고 앞에는 섶섬과 문섬과 범섬이 펼쳐진 바다, 삼매봉과 제지기 오름이 양쪽에 솟아오른 그 속에 사는 게 바로 저입니다”

“여름에는 보목에서 자리물회를 먹고 법환 앞바다에서 해수욕을 하고 겨울에는 귤을 따고 성게미역국을 먹고 사는 게 바로 저입니다. “

이렇게 놓고 보면, 높고 높은 콘크리트 건물들이 한라산을 가리고 앞바다를 막아서서 섬 삼형제를 볼 수 없다면 그건 단순한 시야가림이 아니다. 조망권 침해만이 아니다. 그걸 바라볼 때마다 나에게 전해지는 ‘정기’가 차단되는 것이며 나의 정체성이 침해되는 것이다. 바다에 콘크리트 항구를 만들어 자리와 성게가 사라진다면 그건 바다환경문제가 아니라 그걸 잡아서 먹고 살아야하는 내 생존이 위협받는 것이다.

“너는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어릴 적 만화에서 자주 보던 대사이다.

정체는 남에게 드러내기 전에 스스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에서 출발한다. 국제대회의 그 여자가 자기소개에서 조상과 이웃들을 상세히 말한 것은 왜였을까? 죽은 조상이나 다른 집에 사는 남이 나와 무슨 상관이라고!

호주에는 사라져가는 마오리족 전통 노래를 부르는 젊은 가수가 있다. 그는 그 노래를 부를 때마다 자신이 윗대의 조상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에 전통노래가 끊이지 않고 계승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정신건강과 의사들은 공항장애를 치료하는 방법의 하나로 자신이 어릴 적에 살 던 곳을 찾아가라고 권한다. 세상에 치이기 전 순수해서 행복했던 기억의 공간, 고향은 심리적으로 어머니의 뱃속과 같다. 자신이 뿌리내리고 있는 모태, 그래서 안정감을 얻고 그 위에 행복을 쌓을 수 있는 토대 말이다. 해외에 입양된 사람들이 성장하여 부모의 나라를 찾는 이유 역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받음으로써 심적 안정을 얻기 위함일 것이다. 자신과 닮은 외모, 자신과 같은 유전인자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 속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티벳의 젊은 어머니가 예닐곱살 밖에 안 된 어린 아들이 동상에 걸리는 것을 마다않고 한 겨울에 걸어서 산을 넘어 달라이 라마가 있는 다람살라까지 데려온 것은 아들이 성장하여 겪을 정체성의 혼란이 동상보다 더 고통스러울 것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럼, 자기소개를 이어가볼까요?

“우리 조상은 설문대할망으로 시작됩니다. 그분은 성산일출봉에서 바느질을 했고 죽을 끓여 500명이나 되는 자식들을 먹여살렸고, 물장오리에 스며들어 제주섬의 모든 용천수를 통해 오늘도 우리를 먹여살려줍니다. 김만덕 할망은 재산을 전부 털어 쌀을 사다 굶는 사람들을 먹였으며 해녀 할망들은 마을마다에서 공동으로 작업하여 가족과 마을을 먹여 살렸습니다. 이들은 조냥정신으로 아껴살며 서로 돕고 의지하며 척박한 섬에서 삶이 이어지게 했습니다. 이런 할망들 속에서 태어나 살아가고 있는 게 바로 저입니다”

마을 개발위원회는 있어도 마을 보존위원회는 없는 제주도의 현실, 개발해서 잘 살자는 취지도 좋지만, 우리가 뿌리 내리고 있는 정체성의 모태가 흔들린다면, 개발한들 행복할 수 있을까?

 

오한숙희 / 여성학자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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