素菴, “일본을 이길 수 있는 길, 글씨로 독립운동을 하고자 했던 것”

지난 14일 오후, 서귀포예술의전당에서는 '素菴 玄中和 국제학술심포지엄'이 열렸다.

지난 14일 오후, 서귀포예술의전당 소극장에서 열린 ‘素菴 玄中和 국제학술심포지엄’에서는 의미 있는 연구 결과들이 발표되어 큰 관심을 끌었다.

소암 탄생 110주년, 서거 20주년을 기념해 소암기념관 주최로 열린 이날 ‘素菴 玄中和 국제학술심포지엄’에는 현영모 소암기념관 명예관장을 비롯해 위성곤 국회의원, 이상순 서귀포시장, 오광협 전 서귀포시장, 김용범 도의원, 고영우 기당미술관 명예관장, 현병찬, 박동규, 양상철, 강경훈 등 서예가, 오경수 제주개발공사 사장, 이석창 석주명기념사업회 공동대표, 송형록 서귀포신문 대표, 김현숙 전 제주도립미술관장 등 각계 인사, 소묵회 회원 등 200여명이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이날 윤용택 제주대 교수 사회로 진행된 본격적인 학술발표심포지엄에 앞서 작품 기증식을 갖기도 했는데, 일본 쇼카이샤(書海社)의 가토 쇼인(加藤昌韻)씨는 쓰지모토 시유 선생의 서첩과 마츠모토 호수이 선생이 사용하던 붓과 영인본 도서 등을 서귀포시 이상순 시장을 통해 서귀포시에 전달했다. 

올해 초 소암 선생의 제자 창봉 박동규 서예가를 통해 선생의 서법집을 만날 수 있었다는 중국 남경예술학원 황돈(黃惇) 교수는 ‘조범산방(眺帆山房)의 서법 탐구’ 주제 발표를 통해 육조체에 머물지 않았던 소암의 예술 세계를 분석해 보여줬다.

황돈 교수는 “소옹(素翁)은 일본에 머무르는 동안 마츠모토(松本)와 쓰지모토(辻本) 두 선생을 종유했다”면서 “마츠모토는 구사가베 메이가구(日下部鳴鶴 1838∼1922)의 제자로 그 법통은 모두 중국 서예가인 양수경(楊守敬 1839∼1915)의 영향을 받았다. 양수경은 만청(晩淸) 시기 성숙해져가던 비파(碑派) 서법을 일본에 전한 가장 중요한 서예가”라 소개했다.

그리고 일본에서 귀국한 후 1983년에 휘호한 작품 <해월징무영(海月澄無影)>이 바로 ‘육조체’의 위비 풍격을 가졌다고 할 수 있으나 1965년의 작품인 <청우무성(聽于無聲)>의 풍격은 등석여의 예서, 1983년의 <정명도시(程明道詩)> 작품과 <록이조서화담선생(錄李朝徐花潭先生)> 작품 풍격은 등석여의 전서에 기인한다고 밝혔다.

이뿐 아니라 황돈 교수는 “소암 선생이 중국 송대 소동파(蘇東坡)의 작품을 익힌 것을 알 수 있다”고 했다. 귀국 후 6년(1961) 해서로 쓴 작품 <서가친해암근작정방폭포시(書家親海庵近作政房瀑布詩:가친인 해암공의 근래 작품 정방폭포시)>는 비록 북비의 흔적은 있지만 분명하게 소동파의 글씨의 결구 풍격이 나타나 있다”고 했다. 덧붙여 1982년 소해(小楷)로 부채에 쓴 <적벽부(赤壁賦)>라든지 1989년 해서로 쓴 <소식시사절(蘇軾詩四絶)> 8곡병도 동파의 서체를 활용했다고 설명했다.

조범산방(眺帆山房)의 서법 탐구’ 주제 발표를 하고 있는 중국 남경예술학원 황돈(黃惇) 교수.

황돈 교수는 “이렇게 볼 때 소암 선생은 ‘육조체’의 속박에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풍격을 추구하는 탐색을 했다고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1984년 작품 <이황과길선생려(李滉過吉先生閭)>는 용필이 노련하면서도 자극적이고 아름다우면서도 날카로움이 있다. 점획에 생동감이 있으며 글자의 결구가 여유로우면서도 담백하여 크게 규격을 따르지 않았다. 그 글자의 소탈함은 아마도 이른 시기 익혔던 북위체에서 얻은 것이다. 그러나 풍격에선 이미 위비의 분위기를 버렸다. 이러한 작품이 비록 많지는 않지만 매우 진귀하며 그 경지는 큰 대가가 아니라면 이를 수 없는 것”이라 평가했다.

황돈 교수는 소암서법의 특징에 대해 다섯 가지로 나눠 제시했다. 첫째는 특별히 자신만의 격조를 갖추었고 세속의 굴레에 빠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예로 든 1980년 작품 <이백시(李白詩)>는 단지 한 줄로 써 내리고, 종이의 폭도 몹시 좁지만 그 기세는 매우 풍성해 일반 서예가들이 생각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며 세속의 무리에 우뚝 선 고상한 맛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각종 서체를 수용해 자신만의 독특한 의미 있는 형상을 창조했다는 점이다. 셋째, 대담하게 낙필하고 조심스럽게 수습했으며, 넷째는 신묘한 운필이 전체에 울림이 되게 했다는 점, 다섯째는 분위기에 따라 형상에 변화를 주어 허와 실이 서로 간극을 두게 했다는 점 등이다.

‘현소옹(玄素翁)의 마츠모토 호오수이(松本芳翠)의 수용과 당시의 양상’ 주제 발표에 나선 일본 서해사(書海社) 가토 쇼인(加藤昌韻)씨.

‘현소옹(玄素翁)의 마츠모토 호오수이(松本芳翠)의 수용과 당시의 양상’ 주제로 발표한 서해사(書海社) 가토 쇼인(加藤昌韻)씨는 소암이 1924년에 도일 후 1937년부터 1939년까지의 3년간 서해사의 마츠모토 호오수이로부터 무엇을 흡수하고 어떠한 방침을 바탕으로 서예의 길을 개척해 나갔는지 보여주었다.

소옹이 호오수이로부터 특히 해서에서는 구양순의 서법, 행초서에서는 왕희지의 서법을 배웠을 것이라 말했다. “도일 직후 소옹은 자국의 ‘조선필’을 사용했을 것이라 생각되나(그 붓이 권심필인지 무심산탁필인지 확실치 않음), 그후에는 조선의 붓을 타국에서 입수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일본에서 붓을 구입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을 것”이라 추정했다.

가토 쇼인씨는 “마츠모토 호오수이 문하에서 학문을 쌓아가게 됨에 따라 사용하는 붓도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왜냐하면 호오수이가 1934년에 저술한 『해서추성부(楷書秋聲賦)』 속 ‘초학의 여러분을 위해’라는 항목에서 ‘용필의 선택’에 관해 ‘교본에 쓰인 붓과 동일한 붓을 선택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가르쳤기 때문”이라 풀이했다.

특히 가토 쇼인씨는 “일전에 온쿄도를 방문했을 때, 가게 안에 소옹의 글이 걸려 있었는데 ‘하원지유(何遠之有)’라는 작품으로 논어 속 ‘그리워하지 않은 것이지 멀 일이 뭐 있느냐’라는 의미를 담고 있어서 소암이 얼마나 온쿄도의 붓을 사모했는지를 알 수 있다”고 전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이완우씨가 ‘소암(素菴) 서예의 연원(淵源)’에 대해 발표하고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이완우씨는 ‘소암(素菴) 서예의 연원(淵源)’에 대해 발표했다. 1924년(18세) 오사카로 건너간 이후 소암의 학교생활과 직장생활, 스승으로부터 서예 사사, 공모전 입상, 록담서원 운영 등 1955년까지 재일시절의 삶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그 내용을 옮기면 “1937년(31세) 마쯔모토 호오수이의 문하에 들어가 3년간 글씨를 배웠고, 1940년(34세)에는 마즈모토 호오수이 친우로 칸사이(關西) 지역을 대표하던 서예가 쯔지모토 시유(辻本史邑)의 문하에 들어가 8년간 글씨를 배웠다. 그때 소암은 육조서(六曹書)를 비롯한 각체를 배웠고 특히 행서에 심취했다. 1945년(39세)부터 일본 국내 공모전에 출품하기 시작해 마이니찌신문사 주최 마이니찌전(每日展)에서 3회를 연이어 수상하고, 전일본서도전(全日本書道展)에서 1회, 기타 민전에서 8회를 수상했는데, 당시 소암은 주로 예서 작품을 썼다. 이후 도쿄타이토서도연맹(東京台東書道同盟) 상무이사 겸 심사위원을 지냈다. 1946년(40세)부터 다이쇼중학교(대정중학교) 교사로 3년간 재직하면서 개인서실인 녹담서원(鹿潭書院)을 운영하고, 재단법인 일본서도원(日本書道院) 대의원을 지냈다. 1948년부터 1953년까지 재일거류민단(在日居留民團) 도쿄타이토(東京台東) 부단장 겸 총무를 지냈다. 1953년(47세)에는 오사카로 이주해 모모야마병원(桃山病院) 등에서 서예를 지도했다. 1955년(49세) 고모부 강성익(康性益)이 세운 남주고등학교 교장에 취임하라는 권유와 노부모의 봉양을 위해 2월 법첩(法帖) 꾸러미를 들고 고베(神戶)항에서 석탄화물선을 타고 귀국했다”

특히 이완우씨는 “소암의 예서는 호오수이와 시유 모두에게 영향을 받았다”면서 미려하고 부드러운 서풍, 어수룩한 짜임과 질박한 획법, 청대 예서를 더해 특유의 서풍을 이룬 점이라든지 조지겸(趙之謙 1929∼84)과 왕탁(王鐸 1592∼1652), 명나라 장서도(張瑞圖 1570∼1644)나 청나라 유용(劉墉 1719∼1804)의 서풍 등이 간취되는 점 역시 두 스승의 영향이라고 설명했다.

'서귀소옹(西歸素翁)의 필은락도(筆隱樂道)적 심미(審美)자유 고찰’ 주제로 발표한 한국서예학회 김응학 회장(성균관대 교수)은 “소암의 미학세계는 物我合一해 자연에 회귀하고자 하는 심미적 즐거움의 세계”라고 말했다. “따라서 소암의 ‘人天合一’ 사상은 서예미와 관련해 일관되게 즐거움의 자유세계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서귀소옹(西歸素翁)의 ‘필은락도(筆隱樂道)’적 심미(審美)자유 고찰’ 주제로 발표한 한국서예학회 김응학 회장(성균관대 교수).

김응학 교수는 또, “소암은 사람의 품격을 귀하게 여기면서 자연과의 자유로운 조화를 중시한다”면서 “소암의 ‘筆隱樂道’的 삶은 자신의 본성에 맞는 합치된 삶”으로 보았다. 즉, 서귀포에서의 筆隱的 삶에 대해 ‘사람마다 좋아하는 한라산의 모습이 있고, 지역마다 바라보는 산경도 다르다. 그러나 삼사방으로 보아 익힌 모든 것이 한라산의 참모습임을 알라. 서예도 이와 같다’라는 제자들에 대한 가르침으로 설명했다. 이처럼 소암이 추구하는 바는 인생경지 뿐만 아니라 심미적 자유경지라는 것. “이것은 곧 천명을 깨달아 이에 순응하며 즐거워하고(樂天知命), 즐거워서 근심을 잊으며(樂以忘憂), 한 그릇의 밥과 한 표주박의 물로도 즐거움을 바꾸지 않는다는 소박한 마음가짐이다. 여기서 ‘즐거움’이란 자아표현의 자유이고, 주체가 객체의 속박을 초월해 내심의 자유를 얻은 것이다”라 강조했다.

특히 서귀포소묵회(西歸浦素墨會)의 『素菴先生葬儀錄』에서 발췌해 옮긴 소암의 생전 말씀은 시사하는 바가 무척 크다. “내가 글씨를 사사받으며 공부를 해오는 도중에 다른 길로 가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어요. 쓰지모토 선생님을 만난 것이 좋은 운명이었다고 생각해요. ‘한 길을 파라’ 이겁니다. 나는 글씨 쓰는 것을 ‘이 길이다’라고 판단이 선 뒤에는 외길로만 걸으려 했어요. 어느 길을 가더라도 그 길은 막힐만하면 다시 트여지게 마련입니다. 내가 글씨 쓰는 일을 ‘이 길이다’고 판단하게 된 것은 서예가가 되고자 한 것이 아닙니다. 이 글씨로 일본을 이겨야 되겠다고 마음먹은 것이고, 일본을 이길 수 있는 길을 찾고자 했던 거지요. 그래서 글씨로 독립운동을 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소암은 일본에서 거주할 때 자신의 호를 ‘鹿潭’으로 애용했는데 그 까닭에 대해 김 교수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과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從心所欲不踰矩’의 나이인 7순을 넘기면서 ‘素翁’이나 ‘西歸素翁’이라는 아호를 즐겨 애용한다”면서 “西歸란 말이 참 좋다고 생각한다. 내가 지키고 있는 고향이요, 나의 거처인 西歸浦를 나타내기도 하고, 그보다도 내 나이 西方淨土로 돌아갈 때가 되지 아니하였느냐”라는 소암의 살아 생전 말씀을 그대로 전했다.
김응학 교수는 소암이 추구하는 서예 품격미는 만상의 생동과 자신의 마음이 서로 부합된 것이며 소암이 바라보는 일체 자연만물의 형태미와 동태미는 마음을 기울여 관조하는 대상이 되었고, 대자연의 여러 묘태(妙態)는 ‘소암체(素菴體)’의 無言宗師가 된다“고 보았다.

김 교수는 소암의 서예심미구조에 대해 ‘道·筆·書’라고 했다. “그것은 도에서 출발해 서예로 전환되는 구조이다. 소암의 서예정신은 생명화해, 생명초월이다”라 밝혔다. “자연생명을 토대로 삼고 우주생명을 주제로 삼는다”는 것이다. “소암이 마주한 자연은 자유로운 서예창작의 조건들이다. 곧 외부의 경관, 법칙, 재료 등 예술의 매체를 자신의 생명정감으로 전환시키고 있다. 소암의 일점·일획은 ‘신여물화(身與物化)’의 심미경계이다. ‘신여물화’는 예술의 자유로운 창조를 실현한 것”이라 분석했다.

김 교수는 “소암의 筆魂은 道와 통한다”고 보았다. “그의 書境은 바로 人境이며, 그의 藝境은 눈으로 봄에 道가 거기에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소암의 인생경게는 생명의 본체를 깨달은 道境”이라는 것이다. 이어서 “소암의 ‘필은락도(筆隱樂道)’적 삶은 무한의 도를 유한의 서예로 변화시키고, 유한의 書藝를 무한의 道로 다시 전환시키고자 하는 생명의 여정”이라며 “이것은 소암의 심미적 자유정신이 깃들어 가는 과정이다. 소암의 심미적 자유는 그의 ‘소암체’에 독특하게 반영되면서 道가 서예의 최고 경계임을 우리들에게 확인시켜 준다”고 강조했다.

주제발표 후에는 제주대 윤용택 교수를 좌장으로 주제발표자들과 강경훈, 고상구, 민경삼, 양상철 등이 함께한 토론이 이어졌다.

주제발표 후에는 제주대 윤용택 교수를 좌장으로 주제발표자들과 강경훈, 고상구, 민경삼, 양상철 등이 함께한 토론이 이어졌다. 서귀포시 관계자는 “제주 서예의 정체성과 수준을 한껏 높여준 소암 서예의 지속적인 연구를 통해 서귀포시가 서예문화 확산 및 문화예술도시 구축의 중추적인 공간이 되도록 지속적인 노력을 펼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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