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하자 / 서귀포시청소년문화의집 관장

중·고등학생 시절, 시를 읽으며 시인의 꿈을 키웠던 기억이 난다. 교과서에 나온 시뿐 아니라 유명한 시인들의 시를 외우고 있으면 뭔가 멋있어 보이고 우쭐해지던, 지금 생각하면 조금은 유치한 시절이 있었다. 그때 외웠던 시들은 아직까지 기억이 나곤 한다. 유명하기도 했지만 왠지 뭔가 있어보여서 외웠던 시 가운데 그 유명한 시 ‘꽃’(김춘수 작)이 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이 시에는 ‘부른다’라는 시구가 많이 나온다. 부른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게다가 그냥 부르는 것이 아니고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이름을 부른다는 것. 아이가 태어났을 때 아이를 위하여 부모는 할 수 있는 한 최고의 것들로 준비한다.

그 중에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이름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름에는 그렇게 자랐으면 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정성을 다하여 이름을 정하고 그 의미대로 자랐으면 하고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있지 않았을까? 우리가 누군가를 만났을 때 인사를 하고 이름을 부르면 그 순간 그 이름을 통해 그와 나 사이에는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고 애정과 관심이 커져가는 것처럼.

‘어린이’, ‘아동’, ‘청소년’ 등 그냥 생각하기에는 비슷한 대상을 지칭한다고 여겨져서 그때그때 생각나는 대로 부르곤 하지만 분명한 차이가 있다. 최근 헌법개정과 관련하여 헤프닝이 있었다. 대통령 직속 국민헌법자문특별위원회가 '개헌특위 자문위원회 보고서'를 발표하자 전국청소년관련학과교수협의회, 한국청소년활동학회, 한국청소년지도자연합회 등 청소년계가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논란의 요지는 이 보고서에서 아동, 어린이, 청소년을 ‘아동’으로 통일한다는 것이었는데, 이는 사실상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는 청소년이라는 용어를 소멸시키는 엉뚱한 발상이었다. 개헌특위 자문위는 아동, 어린이, 청소년 등 여러 용어가 혼용하지 않는다며 이를 '아동' 으로 통일하는 이유라고 명시하고 있다.

물론 0세부터 만18세 미만까지로 규정하는 아동과 만 9세부터 만 24세까지 규정하는 청소년의 연령대로 보자면 중첩되는 부분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현재 아동 관련법은 보호와 복지적 시각으로 편성된 법체계이고 청소년 관련법은 창의육성과 역량 증진적 관점에서 만들어진 법체계로 근본적 접근방향이 다르다. 아동은 수동적 입장에서의 대상이라는 성격이 강하고 청소년은 자치적이고 주체적인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 

이름을 부르기 전과 후는 무엇이 어떻게 달라지는가? 우리는 과연 청소년을 어떻게 인식하며 부르고 있는가?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를 생각해 보며 우리는 주변의 청소년을 어떻게 생각하며 부르고 있는지 돌아봐야 할 시점이다.

단순히 청소년기본법에 나와 있는 9세 이상 24세 이하의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청소년은 자기 삶의 주인이다.’라는 청소년헌장의 첫 문장을 생각하며 자기 삶을 살아나갈 청소년을 기대하고 응원하는 마음을 담아 ‘청소년’을 불러보면 어떨까? 진짜 우리의 미래라고 생각하며 부르고 있는지, 다시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때이다.

저작권자 © 서귀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